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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Sep 26. 2016

여행 추억을 싣고 달리다

청춘여행소, 스물두 번째 이야기


현상 

 혹여나 내릴 곳을 지나칠까.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송이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새로운 도시의 기차역 플랫폼에 다가설 때마다 창문 너머 팻말을 확인하기 위해 두리번두리번 했고 옆에 있던 외국인이 '너 내릴 곳 여기 아니야.' 얘기해주기도 했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단잠에 빠지기도, 옆자리에서 특유한 냄새를 풍기던 외국인 때문에 멀미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수많은 추억은 기차를 타고 함께 달리고 또 지나왔다.

 처음 여행 계획을 짤 때 가장 아까워하던 시간이 바로 이동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이동시간을 줄일까 고민하고, 되도록 한창 구경하며 다닐 수 있는 활동 시간을 피해 기차 시간을 예매하기도 했다.


본질

 그런데 언젠가부터 여행지에서 '탈 것'에 대한 여유와 낭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억을 곱씹어 보았을 때, 지루한 이동시간을 때우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느꼈던 강박관념을 벗어버리고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 후 시간이 흘러 여행지에서 이동은 단순히 다음 여행지로 향하는 목적에 맞춰, 빨라야만 하는 운송수단이라는 생각을 버린 뒤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여행 중 이동 시간이 나의 이전 여행을 정리하고 새로운 여행지를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이고도 중요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에 시선을 둔 채 지난 여행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은 충분하게 남으니, 그제서야 나는 지나온 내 인생을 복기하거나 미래를 설계한다. 그러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한참을 가야 하는 버스나 기차 안에서 시간은 나의 내면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가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이동은 오직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의 사치다.
- <나는 평생 여행하며 살고 싶다> 중에서

관점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거나 무언가에만 집중한다고 놓치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도시의 기차역에 들어설 때마다 다양한 삶의 순간들이었다. 


 짐을 들고 내리는 아들을 보자 그를 기다리던 부모님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저 멀리서 달려와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 헤어짐이 아쉬워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깊고 무거운 포옹을 나누는 연인의 모습. 기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여정에 몸을 싣는 사람들의 가벼운 발걸음. 이처럼 이동의 순간은 소소하지만 삶의 중요한 순간들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만남과 헤어짐, 시작과 끝, 기대와 아쉬움, 그리고 기쁨과 슬픔. 모든 것이 공존하고 있는 삶의 귀중한 모습을 나는 창문이라는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디어

뜻밖의 선물

 나폴리에서 베네치아로 향하는 기차 안.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던 그때,  앞 쪽 복도에서 4~5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빠는 아이 뒤에서 혹여나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아이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까 봐 허리를 숙여 아이를 보호하며 따라가고 있었고 아이의 손에는 크리스마스 양말처럼 보이는 큰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뒤뚱거리며 다가오던 아이는 기차에 타고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꾸러미를  활짝 벌리며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덕담을 해주며 꾸러미에서 초콜릿을 하나씩 가져가기 시작했다.  

초콜렛과 함께 아직도 새록새록 기억에 남는 아이의 미소

 긴 이동시간에 지치고 피곤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베풂의 기쁨을 아는 아이의 마음과 아이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한순간 기차에 퍼진 기분 좋은 웃음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담긴 초콜릿은 나에게 뜻밖의 선물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도, 여행을 마친 지금에도 문득 이 사진을 볼때면 그 때를 떠오르게 하고 행복을 느낀다.

기억의 편린

 창 밖으로 지나가는 나무와 숲,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보며 기억의 편린을 쫓는다. 기차처럼 달려만 왔던 긴 시간 동안 잊고 있던 추억들, 아픈 상처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며 가슴을 찌르기도 한다. 좋은 기억만 떠오르면 좋겠지만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자극은 그동안 묻어두었던 나의 모든 기억들을 깨우기 시작한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이전에는 떠오르던 상처를 마주하기가 싫어 묻어두고 덮어두기 바빴는데 여행에서 이동 중에 마주하는 생각들은 한참을 울어도, 한참을 아파해도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다. 도리어 나의 과거에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마치 내 맘을 누가 만져주는 것 마냥 감정을 다독여준다. 그렇게 우리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위로를 받고 더 단단해진다. 


 여행의 풍경에 나의 추억을 묻어두고, 이전 추억을 하나둘씩 꺼내 정리하는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마법 같은 일이다. 마치 새로운 여행지에서 더 많은 걸 얻기 위해 이전 여행지에서의 일들을 다시 기억하며 정리하는 것처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마주할 내 일상을 위해 이전 삶을 추억하며 정리하는 힘. 이것이 바로 여행이 가진 치유의 힘일 것이다.



함께 나누고픈 여행 이야기나 성장여행을 위한 아이디어, 조언이 있으시다면

청춘여행 소 dreamingtraveler2016@gmail.com 으로 보내주세요.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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