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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티 Mar 27. 2017

당신이 알던 심청이가 아니다

죽음과 웃음의 공존 - 떼아뜨로 봄날의 연극 <심청>


 

  떼아뜨로 봄날의 <심청>(3.3~3.19,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은 효(孝)라는 주제 대신 죽음을 앞세우며 새로운 해석의 심청을 풀어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초월적 소재를 가지고 어둡게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네 명의 악사와 세 아들들의 유머러스한 모습도 보여주며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소재만 다른 것이 아니다. 인물들도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심청을 사들인 선주와 새로운 심청 박간난을 내세우며 죽음에 관해 고찰한다. 원전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선주는 아홉 척의 배를 소유한 무역업자이며 매년 인당수에 바쳐야 하는 제물을 쉽게 구하기 위해 심청전을 지어낸 작가이다. 새로운 심청 간난이는 노름하는 아버지에 의해 겉보리 스무 가마에 팔린 처녀이다. 이렇듯 떼아뜨로 봄날의 <심청>은 원전과는 많이 다르다.

    




 


원전과는 다른 심청


 "심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극 중 세 아들 중 한 명의 대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적, 효(孝)를 주제로 한 심청을 의심없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관점에서 보기에 심청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꽤 있다. 돈을 요구하는 종교인, 그리고 그 돈을 덜컥 약속한 심봉사, 심청을 사들이는 선주 등 효(孝)라는 주제 하에 비판받아 마땅한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고 있었다. 심청이라는 고전 작품에서 현재 통용되지 못할 것들을 걸러내고 심청이라는 고전이 가지는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심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마땅히 필요하다.
 물론 이전에 한국 연극에서 심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채만식, 최인훈, 오태석이 심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었다. 그 작품들은 모두 원전과 달리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채만식의 <심봉사>는 심봉사의 죄책감을 다루었다면 최인훈과 오태석의 작품들은 심청이 매춘부가 되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세 작품은 심청이나 심봉사를 다루며 인물에게 닥친 비극에 중심을 두었고 원전의 후일담 형식이다. 이와 달리 2016년에 이어 2017년에 재공연을 이어가고 있는 떼아뜨르 봄날의 <심청>은 박간난이라는 새로운 심청과 선주를 내세워 죽음을 이야기했다.



  원전이 있는 작품이 있는 경우에 관객들은 원전을 떠올리며 원전의 줄거리대로 작품이 흘러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떼아뜨로 봄날의 <심청>에서는 아예 새로운 캐릭터들을 대거 등장시켜 관객들의 그러한 기대를 아예 사라지게 했다. 새로운 심청 박간난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심청이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그녀는 효녀가 아니다. 원전의 심청의 주제가 효(孝)인 만큼 원전의 심청은 엄청난 효녀로 묘사된다. 그러나 박간난은 자신이 효녀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하고, 심지어는 유흥을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아버지를 원망한다고도 한다. 효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전의 심청들과는 차별화되는 간난이지만, 타인을 위해 죽는다는 점에서는 심청과 뜻을 같이 한다. 또 원전에선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선주의 세 아들은 간난이를 설득하는 역할로, 경리는 작품의 긴박함을 조성하는 인물로, 또 마임이스트는 하인도 되었다가 간난이를 죽음으로 이끌기도 하는 등 여러 역할을 겸했다. 



  극의 시작은 우리가 예상했을 법한 시작과 매우 다르다 . 간난이 역을 맡은 정새별 배우는 등을 돌리고 누워있고, 그 앞에는 선주인 송흥진 배우가 간난이를 극진히 모시는 모습이다. 간난이가 제물이 되기를 거부해 곡기를 끊었기 때문이다. 이후 세 아들인 이길, 신안진, 윤대홍 배우는 같은 의상을 입고 같은 유형의 연기로 간난이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개량 한복을 입어 시대를 특정하기 어렵고, 시종일관 어딘가 모자란듯한 인물로 세 형제를 묘사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장남은 낡은 심청전 한 권을 들고 효녀인 심청은 죽지 않고 연꽃을 타고 올라와 살았다고 말하지만, 간난은 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는다.

  다음으로 등장한 차남은 시장에서 샀다는 종이 연꽃을 간난에게 건네며 장남과 마찬가지로 심청전의 한 대목을 읽어주며 간난을 설득한다. 그는 대의를 위해 죽는 사람의 영생에 대해 이야기하며 간난에게 제물이 되기를 종용하지만, 죽음 이후는 알 수 없다는 선주의 말에 간난은 실망하고 만다. 그리고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겠다며 글을 배우고 박간난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써 본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삼남은 두 형과 마찬가지로 심청전의 한 대목을 읽어주는데, 그가 읽어주는 부분은 심청이 모친 산소에 갔던 장면으로 간난이도 그 부분을 들으며 어머니를 부르짖는다. 이후 삼남은 자개함을 들고 와서 간난에게 왕비의 옷을 입고 가채를 쓰게 해 준다. 왕비의 차림을 한 간난은 짐짓 왕비처럼 행동해보려고 시도한다. 이에 선주는 마음을 국모처럼 가져야 한다는 말을 남긴다. 그러자 간난은 모두를 품으려는 마음을 가지고자 하고,  자신의 아버지도 용서하며 대의를 위해 죽으러 간다.


   

죽음과 웃음의 조화

 간난이는 굳은 마음을 먹고 죽으러 나섰고, 선주는 결국 자신에게 가까워진 죽음에 떠밀려 사망한다. 연극 <심청>의 소재나 인물들의 행동은 슬픔이나 서러움, 고통, 비장함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공연 중간 여러 차례 웃음을 터트릴 수 있다. 죽음과 웃음. 굉장히 이질적인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는 공연이기 때문이다.

  이수인 연출은 <심청>의 작품의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희극적 요소를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선주의 세 아들과 코러스였다. 선주의 세 아들은 시종일관 자신이 선주의 자리를 물려받겠다며 서로 다툰다. 그들의 다툼은 정적이거나 비장한 것은 아니다. 세 아들은 마치 아이 같다. 그들은 어린 아이처럼 서로를 붙잡고 맴돌며 싸운다. 그들의 요구는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고 떼를 쓰는 아이의 모습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서로의 말을 자르고 자신의 말만 하는 모습이 꼭 그랬다. 어찌 보면 굉장히 예의 없고 경박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지만, 세 아들의 이런 모습 덕분에 관객들은 웃을 수 있었다.

 코러스도 마찬가지이다. 무대 좌측에 앉아있던 네 명의 코러스는 타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과 두 명의 가수, 한 명의 기타리스트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이들은 음악만 연주한 것이 아니다. 코러스들은 선주와 대화하거나 인물들에 대해 설명해주는 역할도 했다. “세 아들 퇴장.” 같은 대사를 통해 아들들을 쫓아내는 모습이나 트라이앵글을 통해 장면의 마무리를 해 주는 모습들은 비장한 분위기를 전환하며 관객들을 웃겼다. 악사들의 음악과 코러스도 독특했다. 심청전의 악사라고 하면 국악을 떠올릴 것만 같지만 이 작품에서는 기타를 메인으로 내세워 서양음악의 느낌을 가지면서도 코러스의 한스러운 소리는 심청의 절절함을 표현했다.  

 세 아들이나 코러스가 단순히 관객들을 웃기게 만들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다. 세 아들의 억지스러움이나 고집스러운 모습들을 바라보며 관객들은 웃기기도 하지만 비이성적이고 자신들의 욕구에 충실한 모습에 답답함도 느낀다. 그러나 간난이가 결국엔 세 아들들에게 설득되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아버지의 유흥을 위해 겉보리 스무 가마에 팔린 간난이를 죽게 한 인물들이다. 이런 이기적인 인물들에게 속아 넘어가 대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간난이의 모습은 작품의 비극성을 한층 더 높여준다.           


결국엔 죽음을 향해서

 이쯤되면 의문이 생긴다. 이강백은 왜 심청전을 각색하여 죽음을 논하는 작품을 만들어냈을까. 아마도 작가는 원전의 심청이가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에 심청전을 각색한 것 같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심청전에서 심청이는 스스로 인당수에 몸을 던져 용궁에서 지내다 연꽃을 타고 물 위로 올라왔다. 마치 이승 이후 같은 용궁에서 지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게 아니었을까. 심청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문을 선주와 간난이의 비교를 통해 관객들에게 던져주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선주는 간난이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 사실은 막내 아들의 대사를 통해 한 번 더 강조되었다. 하지만 선주와 간난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매우 달랐다. 간난이는 처음에 죽음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몇 차례의 자기 인식 과정을 거친 후에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인당수로 향했다. 간난이는 새로운 옷을 입어보며 옷에 맞는 태도를 보이려고도 해보았고 자신의 이름쓰기를 배워 종이에 직접 자신의 이름을 적어보는 소원까지 이루어 가며 점차 죽음을 맞이했다.

 선주는 간난이와 반대다. 그는 극 초반에 자신은 늙었고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선주는 시간이 갈수록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쳐왔던 제물들에 대해 고뇌하기도 하고 손해를 보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간난의 죽음을 미루거나 간난이 아예 죽지 않아도 되는 방법도 마련해본다. 간난이의 죽는 순간은 작품 내에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간난이와 다르게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준 선주의 마지막은 죽음에게 떠밀려 초라하게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떼아뜨로 봄날의 <심청>은 심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던 작품들이 심청이나 심봉사의 후일담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주목받지 못했던 선주가 실은 심청의 작가였다는 설정과 간난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 죽음을 주제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무척 신선한 작품이다. 특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다른 두 인물을 대비시켜서 서로의 죽음을 극명하게 구분시켰다. 간난이와 선주의 죽음을 통해 작품은 관객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묵직한 존재가 어떻게 소비되는지 다 함께 고민해보면 그 답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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