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대화를 반주삼아
내가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나온 수필 작가가 ‘제철 행복’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한참 ‘제철’과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이 책의 소개글에는 ‘계절이 지금 보여주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 24 절기의 보폭으로 천천히 걷는 삶의 기쁨’을 기록한 글이라 나온다. 그렇게 라디오를 들으며 ‘제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각인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부산에서 인제로 올라온 어머니께서 감자를 잔뜩 사셨을 때 감자철이 여름인 것을 그제야 알았다. 마흔이 넘도록 엄마가 감자를 좋아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너그러운 자연은 감각에는 무디고, 감정에는 예민한 내게도 때가 되었다는 듯 제철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이 한참 제철 이야기를 하기 전, 작년 늦가을 대도시에서 인제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계절이 전하는 감각을 남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새로 살게 된 동네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같은 지형을 작지 않은 천이 가르고 있었다. 그 천을 바라보는 9층 건물에 숙소가 있었던 나는 간혹 매섭게 눈이 내릴 때면 꼭 이곳에 갇혀버릴 것만 같은 공포심마저 들었다. 산과 나무, 쌓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덮어버렸던 설경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풍광 앞에 꼼짝없이 항복하는 경험을 선사해 주기도 했다. 겨울이 혹독함으로 깊었던 만큼 봄의 따스함은 낯설고 찰나적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꽃샘추위 앞에서 자꾸만 피어나기를 망설였던 꽃봉오리들의 모습만 잔뜩 기억나는 봄을 보낸 기억이 없는데 여름이 찾아왔다. 시골로 이사 온 후 큰 경쟁 없이 등록했던 수영 강습에서 미약하게나마 배워놓은 수영으로 여름을 버티었다. 숨 막힐 것 같은 더위는 아이러니하게도 숨 막히는 물속에 나를 풍덩 던져버리고 나면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인간이 오래 누리고 싶은 계절들은 짧아지고 어떤 모양으로든 견디거나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많은 계절들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세상을 점령해 가고 있다. 도시가 주는 인공적인 풍요 대신 자연의 맨 얼굴을 더욱 생생히 마주해야 하는 이곳에서 절기와 제철의 의미를 온 감각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특히 여름에는 밤 최저기온이 25도 이상인 열대야일이 기상기록 기준이 된다는 1973년 이후 1위를 달성했고, 평균 최고기온은 30.4도로 2위를 기록했다. 이 여름은 개인적으로도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외로움과 직장에서 뜻하지 않았던 부하 직원들의 사고로 더욱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무더위가 주는 고통과 뜻하지 않았던 인생에서의 고난이 나를 뜨겁게 달구면 그 열기를 식혀야만 숨이 쉬어졌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 헬스장을, 수영장을, 바다를 찾아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물속에 풍덩 빠지기 하나도 춥지 않은 날씨를 보며 이게 여름의 제철맛이라는 것을 마흔이 넘어서 깨달았다. 뒤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인 인생의 묘미는 그렇게 닳아 없어져야 끝날 것만 같은 담금질의 시간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감각에는 무디고 감정에는 예민한 어리석고 불균형적인 나의 면모로 인해 진작 깨달아야 했을 것들을 항상 뒤늦게 알아챈다. ‘아, 그때는 왜 이것을 몰랐을까, 깨닫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은 마치 내 인생을 지배하는 코드처럼 나를 침잠시킬 때가 많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습관적으로 회한의 감정을 느끼는 나와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순간 그 시절로 돌아가도 나는 유사한 모습으로 비슷한 실수들을 되풀이하며 살아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라는 사람을 이해할수록, 알아갈수록 나 자신의 유치함, 아둔함에 깜짝깜짝 놀라고 가엽다 못해 귀여움도 느껴진다. 아직도 이렇게 천진하다니! 천진함도 제철에 벗어내지 못하면 청승이 되고 주책이 되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할수록 나는 나다. 나는 적당히 나를 포장해 그 시간과 장소에 꼭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능숙한 척하지만 서툴다. 감각은 아둔하고 감정은 요동쳐서 쉽게 휩쓸린다. 그래도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함께 있는 사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무섭도록 올바르고 곧은 사람이기보다는 잘 휘어지고 부드러운 편이다. 이런 속성들로 나를 정의하는 것이 부질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하늘처럼 나 역시 ‘내면이 단단하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라는 의외의 평을 타인에게 듣기도 한다. 그저 여기에 나를 묘사해 보는 것은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연습이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고유의 무늬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스케치해 본다. 소묘로 표현되지 않는 부분은 팔레트에 담긴 물감으로 형태 없는 색만 칠해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어떤 모양이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기 위해서만큼은 최선을 다한다.
언제나 필요한 것을 한 발짝 뒤늦게 깨닫는 나인줄로만 알았는데 내게 이런 깨달음은 지금이 제철인가 보다. 더 이르게 왔다면 설익었을 것이고 더 늦었더라면 많이 아쉬웠을 깨달음. 그렇게 제철에 찾아온 것을 맛있게 한 입 베어 물고 야무지게 삼켜 보려고 한다. 마침, 이때 즈음 더욱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와의 제철대화를 반주 삼으면, 소화하기 조금은 벅찬 단단한 것들도 고유의 맛을 풍성하게 음미할 수 있을 만큼 꼭꼭 씹어낼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