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인제로 가는 길에는 터널이 많다. 그 길에 터널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고자 여러 번 시도했지만 세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운전 앞에서는 그 정도의 집중력도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 터널들이 음침하게 느껴졌다. 직업의 특성상 늘 떨어져 지냈던 세 식구가 작년 초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한 지 칠 개월 만에 또다시 헤어지게 되어 혼자 강원도 인제로 이사를 와야 했다. 터널은 마치 그런 내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느껴졌 다. 터널 안에서의 어둠, 그로 인해 한결 어두워지는 시야와 윙윙거리는 소음, 떨어지는 집중력,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운전을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강원도는 관광지로 유명한 만큼 낭만도 있다. 특히 내가 있는 곳은 내린 천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도시가 주는 활기 대신 자연이 주는 장엄함과 생동감이 있는 살아있는 이곳에서 가장 먼저 깨달았던 것은 삶의 필요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대형할인점이나 유명 잡화점이 가까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줄로만 알았는 데 그저 편의에 길들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소 철학적이고 싶을 때에는 '아,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인지, 욕망인지!라는 생각에 잠기며 이곳이 아니었더라면 하기 어려웠을 사색과 고요의 시간을 누리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 여기의 삶에 애착을 가지는 것도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화려한 도시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멋진 백화점, 한 블록 건너 손짓하는 수많은 맛집과 '스세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곳곳마다 존재하는 도시의 삶이 익숙했다. 그 무엇보다 다섯 해가 전부인 인생에서 두 해도 내 손으로 직접 키우지 못해 늘 아쉽고 보고 싶은 어린 아들과 아이 아빠는 이곳에 없었다. 몰아치는 고된 일 속에서도 친구와 다름없이 우정을 나누던 가까운 직장 동료들도 떠나온 그곳에 있었다.
그런 대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마음은 터널처럼 어둡고 시끄럽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는 별개로 원하지 않는 이별을 다반사로 감내해야 하는 생활은 많은 직업 군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주어진 가장 어렵고도 쉽게 끝나지 않는 숙제가 아닌가 싶다. 휴가일 때는 아이와 떨어져 있는 일분일초가 아쉬운 마음에 종종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지 않고 직접 데리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이에게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내가 휴가일 때도 아이가 정해진 일과를 할 수 있도록 유치원에 데려다준다. 조금씩 커갈수록 이전과는 다르게 날짜를 알고 숫자를 세고, 내가 있는 곳이 ‘인제'라는 것까지 알게 된 아이가 나의 휴가 일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휴가 마지막 날에는 유치원에서 돌아오고 나면 엄마가 더 이상 대전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아이를 등원시키는 날은 더 유난스러운 곤욕을 치른다.
그날도 휴가가 끝나는 날이었다. 통상 여섯 살부터 다니는 유치원에서 등원할 때 엄마와 떨어진다고 그렇게 크게 울어대는 아이는 잘 없기 때문에 그런 날이면 선생님들은 내가 인제로 올라가는 날임을 쉽게 알아차린다. 아이와 헤어지는 순간은 어떻게 해도 쉬워지는 방법을 알 수가 없어서 아이를 달래듯 나 자신도 달래야 할 때는 소설책을 펼쳐 들고는 한다. 작가가 써 내려간 누군가의 인생을 제삼자가 되어 읽으면서 내 인생이 소설이라면 어떤 이야기일지 생각해 본다.
다행스럽게도 대단히 극적인 요소는 없을 것임에 조그맣게 안도하고,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위안하는 책이라는 존재에 고마워한다. 그렇게 펼쳐든 책에서 한 인물이 터널과 관련된 속설을 이야기하는 대사가 나왔다.
‘숨을 참고 터널을 다 지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해요.’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나 돌아가는 길에 그러다가는 소원을 이루기 전에 수명부터 다하겠다.'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빨래처럼 젖어 축 쳐진 내 기분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이내 그 속에 담긴 '소원을 가진 자의 간절함'에도 생각이 미쳤고, 터널 속 캄캄함과 인생의 어두운 시간이 꽤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터널은 산, 바다 등의 밑을 뚫어 만든 길이다. 보통 비유적으로도 누군가의 어둡고 힘겨운 시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런 터널은 우리를 목적지에 훨씬 더 빠르고 쉽게 다다르게 도와준다. 다는 아닐지라도 우리 인생의 어두운 시간은 때로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에 조금 더 빨리 가도록 도와주는 터널일지도 모른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이 우리 인생에 빛을 드리우기 위해 먼저 만나야 할 어두움이 있다면 그런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든 터널은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 끝은 우리를 다음 목적지로 안내하는 또 다른 길의 시작일 것이다.
터널 안에서 숨을 참는다는 것은 아마도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좀 더 참고 인내하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나 역시 코 끝에 아른거리는 아이의 숨결을 참고 터널 길을 향해 운전대를 잡는다. 장거리 운전으로 쌓인 피로가 한계에 다다를 때쯤이면 가로등 하나 없이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의지해야만 앞이 보이는 시골길이 나올 것이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졌음이 한결 실감 나는 순간이다.
'엄마는 이곳에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을 지켜야 해'라고 헤어짐의 이유를 설명하자 ‘그럼, 나는 왜 엄마가 안 지켜줘!'라고 말하며 나를 와락 끌어안던 아이의 온기가 생생하다. 나의 보람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늘 멀리 두고 온 소중한 존재들에 대한 그리움과 비례한다.
지금으로서는 이 터널의 끝이 어디쯤 일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어둡고 소란스러운 길은 반드시 끝날 것이며, 소원을 이루기 위해 숨을 참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 길을 지나다 보면 다음 목적지로 나를 인도할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