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의 한계를 인정하고 얻은 뜻밖의 자유
나는 자기 객관화가 꽤 잘 되는 편이다. 나를 남 보듯 관찰하는 습관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타인의 마음과 뇌의 움직임이 궁금해 심리학자를 꿈꿨고, 프로파일러가 되고 싶어 했다. 고등학생 때, 집안의 내력인 음악의 피가 불쑥 솟구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음악은 달콤했지만, 그만큼 냉정했다. 고등학교 2학년, 12월의 크리스마스 공연을 끝으로 나는 미련 없이 진학을 포기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내 재능은 '음악으로 먹고살기엔 애매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른 음향으로 전공을 틀었다. 누가 봐도 이과적인 머리였으니 성공률이 꽤 높은 선택이었고, 예상대로 재수 없이 한 번에 대학에 붙었다.
대학에 가서도 내 안의 '딴따라' 기질은 멈추지 않았다. 인디밴드를 한답시고 서울과 세종을 오가며 매일 4시간씩 자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일주일에 공연을 세 탕씩 뛰며 무대에 서던 날들. 그러다 운 좋게 기획사 대표님 눈에 띄어 휴학을 하고 연습생 생활까지 하게 됐다.
하지만 데뷔곡이 나올 무렵, 갈림길에 섰다. 회사에서는 '자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그 정도로 대단한 재능인가?"라는 물음에 내 안의 자기 객관화 스위치가 다시 켜졌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라는 결론과 함께 나는 복학했고, 자연스럽게 지금의 PD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게 운이 좋았다. 편집 툴을 다루는 감각은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했고, 익히는 속도도 빨랐다. 마침 유튜브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던 시기였고, 내 소박한 목표는 편집으로 한 달에 딱 100만 원만 버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영상을 보고 지상파 PD님께 연락이 왔을 땐, 솔직히 설렘보다 겁이 앞섰다.
수화기 너머로 한참을 물었다. "저는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촬영장에 가서 뭘 해야 하나요?" 진심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명료했다. "일단 나오세요." 그렇게 얼떨결에 나간 현장에서 어느덧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나치게 물 흐르듯 흘러온 삶이라 그런지, 이 일에 거창한 꿈을 품고 도전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 그런 이들을 마주하면 뭐라도 보태주고 싶은 마음에 나도 그 PD님처럼 말하곤 한다. "일단 나오세요." 현장엔 분명 답이 있으니까.
이렇게 적고 보니 내 20대는 참으로 롤러코스터 같았다. 직원을 다섯 명씩 두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적도 있고, 사무실 월세를 밀려 전전긍긍하던 밤도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연애는 한 번도 쉬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나 자신에게 진심 어린 박수라도 쳐줘야 할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늘은 서른 살의 4월 1일이다. 만우절이니 누군가 나타나 "사실 너 서른 살인 거 다 거짓말이야"라고 한다면, 솔직히 좌절할 것 같다.
나는 지금의 서른이 좋다. 20대로 돌아간다면 정말이지 좌절할 거다. 그 치열하고 불확실했던 시간을 다시 반복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때만큼의 뜨거운 열정도 이제는 내게 남아 있지 않다. 이제는 조금 쉬어가고 싶다.
쉬어가고 싶다... 고 적으며 이번 주 스케줄을 확인한다. 7일 중 5일은 촬영이고, 남은 이틀은 밤을 새워 편집을 해야 한다. 모순적이지만 이게 내 현실이다.
나름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나 돌아보니 치열하게 살아온 20대를 이제 차근히 기록해보려 한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쉬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