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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속먼지 Oct 18. 2018

이게 딸 결혼식이면 몰라, 아들 결혼식에 난 싫어.

왜 이런 말을 하셨냐는 말을 나는 언젠가 하게 될 것 같다.

지워지지 않는 말.


그냥 그렇게 가슴에 남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그래서 화나고, 급기야 한동안 만나지도 않던 그 사람들이 싫어지는 말들이 있다. 


작은 결혼식을 한다는 말에 반대를 표하며 "이게 딸 결혼식이었으면 모르겠는데, 아들 결혼식이어서 난 더 싫어" 라고 하던 남편 어머니의 말. 


신혼 집으로 처음 이사 들어가는 날, 우리 엄마는 이미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를 도와주고 있었고, 내가 고용한 이사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분 또 도와주고 계셨다. 그리고 남편의 자취방에서 있던 짐을 옮겨줄 겸 집을 구경하러 남편 아버지와 어머니도 오셨다.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시어머니에게 "사모님이 부엌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라고 하자 민망한 듯 웃으시며 "제가 시모예요. 친정 엄마가 아니라 시어머니에요." 라고 한 그 말.


결혼 얘기가 나오자 한번 식사를 하자던 자리에서 남편이 "설 명절 즈음에 어머니 아버지 뵈러 집에 갈까 하고 있어." 하자, 남편의 누나는 "엄마랑 얘기 된 것 맞아?" 하였고 남편이 얘기하고 있다고 하자 "내가 들은 것이랑 다른데?" 하며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던 남편 누나의 말과 표정.


저희 부모님은 해외 여행 가족들끼리 가서 작게 하자고도 하시더라구요 - 라는 나의 말에 "댁들이 연예인은 아니잖슈"라고 하던 남편 아버지의 말. 


집을 사려면 분양 신청을 미리 잘 해두라는 말을 하다, 동사무소 갈 시간이 있던 내가 세대주임을 알고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세대주를 누가 하니"라며 본인의 등본까지 꺼내오며 "이런 세대주는 다 남자가 하는거거든" 이라고 하던 남편 어머니의 말. 


미국에 파견간 친구와 스케줄이 맞아 잠시 휴가를 내고 엘에이를 다녀오게 되었다는 나의 말에 "너 자꾸 결혼한 여자가 그러면 안돼"라고 하던 남편 어머니의 말. 그 목소리.


"이제 너희도 이런걸 알아야 해"라며 나의 생일을 기념하여 만난 식사 자리에서 제사 스케줄을 일러주던 남편 어머니의 말. 


나는 남녀 관계없이 모두 차례를 지내고 절을 올리는 집에서 자라왔기에, 너무나 당연히 명절 차례날 절을 같이 올리려는데 당황하며 "형수님 내려가셔야 될 것 같은데" 라고 하던 남편 동생의 말. "너가 거기 왜 올라가있니"라던 시어머니의 말.




나는 딸이 둘이던 집에서 자랐고, 아버지 어머니는 단 한번도 내 성별이 내가 살아가는 데에 어떠한 제약이 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가난한 군인의 자식으로 자란 우리 아버지는 성실함으로 '성가'하셨지만, 할아버지가 가난한 군인이었음에도 대학까지 보내줬기 때문에 '자수성가'라는 표현은 쓰지 않으신다. 우리 집은 유복했다. 나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며 자라왔고, 급하게 어디게 가야하는데 부모님이 라이드가 어려울 경우엔 아버지의 기사아저씨가 기꺼이 나를 도와주셨던 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주부였지만 가사 노동에 대한 의무는 전혀 없었고, 유일한 주부로서의 의무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따듯한 시간에 집에 있기 정도였을까. 차례는 여성에게 더 많은 일이 있긴 했지만, 일년에 단 두 번, 어머니에게 가사 노동 의무가 있었던 것이고, 그마저도 대부분 도우미 아주머니가 이미 해두신 일을 단순히 그릇에 옮겨담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늘 자상했고, 어머니는 늘 행복했고 당당했고 자기 삶이 있었다. 그렇기에 가까운 누군가가 여성이므로, 여성으로서, 억압받는 모습을 나는 단 한번도 보지 못하고 자라왔다.




나는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평등하고 나름대로 선진적인 분위기 속에서 20대 초반을 보냈다. 이십대 중반 첫 직장은 외국계 기업이었고, 한 두 사람이 여자가 어떻고. 이런 말을 할지언정 전반적인 기업의 분위기는 그런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서 25년 이상을 보내고 나는 결혼을 했다. 


남편은 자상하고 나에게 늘 져주고, 나를 늘 응원하고, 내 커리어를 자신의 커리어 만큼이나 높이 생각해주는 남자다. 누구나 사위삼고 싶어하겠지. 강남에서 반에서 몇등 - 이러며 일평생 자라온 남편은 다소 와일드(!)하고 자유 분방한 나를 신기해하였고, 사랑해주었고, 존중해준다. 


그런 남편과의 오랜 연애. 그리고 26살의 다소 이른 결혼.




결혼식은 작게 하고싶었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내 뜻대로 내 결혼식을 이루었다. 


양가 각각 100명 내외의 (이게 정말 작은것이겠냐만은, 4남매, 3남매인 부모님의 친척을 포함하니 거의 가족 결혼식 수준이었다.) 하객을 초대하였고, 주례도 없었고, 친구가 우리를 위한 곡을 작사 작곡하여 축가로 불러주었고. 따뜻했고 만족스러운 결혼식이었지만 이를 위해서 결혼 초반 남편의 부모님과 일부 갈등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원체 결혼식에 바쁜 주위 사람들 불러 아무리 호텔이어도 맛 없는 밥 먹이며 겨우 쉬는 주말 3-4 시간을 바치게 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셨나보다. 그래서 내가 꼭 내 결혼식을 축하해줄, 주말 3-4시간이든 10시간이든 기꺼이 와줄 사람들만 불러 작은 파티처럼 결혼하고 싶다 얘기했을때 적극 찬성해주셨다. 어차피 축의금은 받을 생각하며 낸 적 한번도 없는 분이셨고, 내 결혼식에서도 우리 집은 축의금을 '정중히 사양'했다.


하지만 남편의 가족은 아니었다. 앞서 결혼한 남편의 누나는 약 1천명의 하객이 있는 결혼식을 서울의 큰 예식장에서 하였다. 그 누나의 시부모님 되실 분들은 진즉 은퇴하여 초대할 하객이 많지 않았고, 남편의 아버지는 막 은퇴를 준비하시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1천명의 하객 중 600명 이상이 남편네 집 하객이었다고 하고, 예식장에는 자리가 없어서 뒤에 사람들이 잔뜩 일어나있어 민망했다고 한다. 식사 티켓을 나눠주는 것은 남편 아버지 은퇴한 직장의 신입 직원을 선착순 3명을 자원 받아 앉혀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죄송하지만, 상상으로도 싫은 결혼식이었다. 차라리 결혼식 생략하고 가족들끼리 밥 먹고 언약식하고 시청 가서 서류 등록하고 싶다. 은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뿌려둔 돈을 '회수'하는 결혼식. 정신없이 결혼'식'을 하고, 신부와 신랑의 '힘찬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식권을 받아 식당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절반인 결혼식. 


나는 결혼식을 사치스럽게 하고싶지는 않았고, 누군가가 주말에 일어나서 "아 귀찮아" 하면서 준비를 하거나, "그냥 돈만 내줘"하는 식으로 내 결혼식에 오길 원하지도 않았다. 


남편의 부모님과 나는 남편을 매개체로 서로의 뜻을 전달하였고, 나의 완강한 뜻을 직접 꺽어보고 싶으셨는지, 한번 얼굴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첫 마디는 남편 아버지의 "이거 먼저 물어볼게요. 꼭 지금 결혼을 해야겠어요?".


지금 결혼은 제가 하자고 한게 아닌데요. 


라고 말은 못했다. 남편을 쳐다보며 "이정도 합의는 하고 나왔어야지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되는 거야?" 라고도 말은 안했다.


남편의 어머니는 여러 말투와 여러 말들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꼭 축하하고 싶은 사람들만 부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너가 초대하려는 그 사람들이 너를 정말 축하할 사람들인지는 어떻게 아니? 정말 친한 사람들이어도 귀찮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냥 직장에서 초대한건데도 진심으로 축하할 수도 있는 거잖아." (친한 사람들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이 없지는 않습니다. 라는 말은 못했다. 이젠 나도 내공이 쌓여서 하지만.)

"나는 내 아들 잘 키웠다고 사람들한테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결혼시키고 싶어. 도둑질하듯 쉿쉿 숨기듯이 그런 결혼을 왜 내가 시켜야해."

"결국 너가 하겠다고 하면 결혼 하겠지. 근데 나는 뒷끝있는 사람이라 계속 생각나고 결혼해서도 너를 환영하지 못할 것 같아."

그리고 저 위의 말. 

"이게 딸 결혼식이었으면 모르겠는데, 아들 결혼식이어서 난 더 싫어. 너희 부모님은 너가 딸이니까 또 작은 결혼식 괜찮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


1시간 정도 만나던 시간인데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약간 정신 줄을 놓고 있었고, 정성을 다해 대화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대답하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남편의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다.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 화장이 번지지 않도록 눈물이 맺혀있는 눈 안쪽 부분만 톡 찍어 눈물을 닦던 그 모습. 




어떻게 헤어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 내 친한 친구들은 "시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는데도 끝까지 작은 결혼식을 했으니 대단해"라고 하였던가. 


집에 돌아와서 나는 부모님에게 어쩌면 그냥 그런 시장통 같은 결혼식을 해야할 것 같기도해- 라고 하였고 아버지 어머니는 "그래, 그냥 너가 양보해드려."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큰 결혼식을 하게되는구나 - 하고 있었다. 대신에 나는 약간 약올리듯 이런 제약을 두었다. 

작은 결혼식은 그럼 양보할게. 대신 작은 결혼식은 양보하되, 야외 결혼식은 내 마음대로 할래. 하여 우리는 대형 야외 결혼식을 (!) 할뻔 하였다. 그런데 서울에서 대형 야외 결혼식이 가능한 식장이 얼마나 있느냔 말이지. 결국 신라호텔 앞뜰 뒷뜰 다 빌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 - 이런 말까지 나오던 중이었다.


사려심 깊은 울 아버지는 자고 있는 나를 깨워 잠시 얘기하자고 하더니, 공무원 가정에서 600명 하객 초대해서 신라호텔에서 예식 올리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우리 딸이 더 통크게 양보해보자고, 선택은 너가 하는 거지만, 잘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알았어 아빠" 하고 헤어지고 내 방에 와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던 것 같다. 아빠는 나한테 결혼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키웠으면서. 한 번도 내가 하고싶은 것 못하게 한 적 없으면서. 늘 자기만 믿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내 인생의 결혼식 날에 양보하라고 하다니. 아빠는 내 마음을 모르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느껴졌다. 


아빠 마음도 아프겠구나. 

아빠도 새벽 일찍 깼다가 잠이 안와서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내려와서 잠든 나를 깨웠구나.


그래서 계속 눈물이 났었다. 나는 왜 아빠가 하지 말라는, 일찍하면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결혼을 친구 중에 가장 먼저 하려고 하면서 불행해하고 있는 걸까 하면서 눈물이 났다. 




때아니게 나를 도와준 것은 남편의 아버지였다. 누나 결혼식때는 급하게 은퇴하느라 사람들 많이 불러야해서 피치 못하게 사돈에게 실례를 하였지만, 원래 하객 수는 비슷하게 맞춰야 하는 것이라고. 며느님댁에서는 총 하객수와 상관없이 100명 내외로 하객을 초대하려는 것 같은데, 우리도 그렇게 맞추자고. 예의를 갖추자고. 그렇게 어머님을 설득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작은 결혼식을 할 수 있었고, 결혼식은 너무 재미있었고, 하객 하나하나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내 친구와 남편의 친구들만 모아 피로연을 하였고,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나는 비싼 신발이 불편하여 결국 맨발로 뛰어다니며 술을 마셨고 과음으로 다음날 해장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아직도 자기도 결혼한다면 꼭 그런 결혼식을 하고 싶어. 라고 말해준다. 


저때의 마음의 감정은 없어진 듯 남편의 가족들과 나는 잘 지낸다. 2주에 한번은 꼭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하호호 웃고. 생일이면 선물을 주고 서로 응원해주고.


그런데도 가끔씩 기억이 난다.

그 말들. 그 표정들. 


그리고 그럴 때면 바로 일주일 전에 얼굴을 보고, 잘 지내던 그 분들이 미워진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 나는 뭐 한게 없는데 갑자기 누군가 저 멀리서 나에게 원한을 품는 느낌은 뭐지? 라고 생각하시려나.

어쨋든 오후에 커피를 마시다, 아침에 샤워를 하다, 티비에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을 보다, 그런 말들은 다시금 생각나고 마음은 방금처럼이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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