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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현 Jun 10. 2022

엄마의 소원은 멸치였다

남편의 육아일기


멸치는 왜 대왕이 되었을까, 자동차에서 나오는 은수의 동화 중 멸치대왕을 들으면 늘 먼저 드는 생각이다. 궁금해만할 뿐 똬리를 틀고 생각해보거나 찾아보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속된 말로 쪽수가 많아서 그렇겠거니 하고 넘겼을 뿐.


 점심에 멸치반찬으로만 끼니를 떼웠다. 직전에 엄마랑 통화를 한 덕분이다. 휴가계획을 핑계로 전화를 걸었는데 첫 마디가 “멸치는 (안떨어지고) 있냐?” 였다. 아이들 멸치도 있고 우리들 멸치도 있다고 답하자 핀잔어린 말투로 “왜 여태...” 그렇게 멸치로만 멸치로만 삼십여분을 통화했다. 매일 아침에 멸치 주먹밥을 먹이고 있어요, 아침에만 먹일 게 아니라 매 끼니마다 내놓고 골고루 먹여야 한다, 잘자란(작은) 멸치는 먹기는 편한데 맛이 없어서 라는 둥, 고추기름에 바로 무쳐서 먹는 게 맛있다는 둥.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내가 지금 소고기 육회가 먹고 싶다고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예상대로 화제는 쉽게 바뀌었지만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다.


 쉽게 말해 엄마의 소원은 멸치였다, 멸치. 그것은 나의 성장이자 자람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는 아빠보다는 외삼촌을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키’ 때문이었다. 우물을 길어다 먹는 외갓집에서 팩우유를 배달해 먹였던 이유가, 태교를 아빠가 아닌 외삼촌으로 했던 이유가, 도시락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킨 유일한 반찬이 멸치였던 이유가 바로 키 때문이었다. 삼십년을 넘게 멸치처럼 들들 볶으며 들은 이야기다. 아직도 우리집 냉장고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저 멸치란 이야기다. 세상이 점점 왜곡되어가고 악인의 번영이 실재하고 또 그것의 유예기간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데 엄마는 아직도 멸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때마침 욥기서를 읽고 있다. 온갖 어려움과 외면 속에서 꿋꿋하게 신의 뜻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욥의 이야기가 엄마의 멸치이야기와 어느정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인들도 잠시 번영하다 사라지고 풀처럼 마르고 시들며 곡식이삭처럼 잘리는 법이다(욥 24:24)” 하지만 엄마의 멸치는 나의 생애에서는 결코 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까스로 내가 왜 이런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시우를 위한 기도문을 작성하려다가 (시우에 대한) 나의 소원을 물었고 엄마는 나를 위해 어떤 기도를 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나에게 멸치란 엄마의 바람이고 꾸준함이고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내가 멸치를 눈물에 섞어 먹을 때가 올 것인 즉, 그건 아무래도 엄마의 기도를 내 삶에서 누렸을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각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시우를 위한 기도도 완성되었다.


“악인의 강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의인의 선한 수고를 억울해하지 말고. 의로움과 선함으로 행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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