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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Jo Dec 14. 2023

왜 ‘긍정주의’라는 말은 어색할까?

고무와 유리, 그 바깥


자기 계발서나 칼럼을 보다 보면, 회복탄력성에 대해 다룰 때 흔히 고무공과 유리공 비유를 많이 든다. 한 번만 떨어져도 산산조각이 나는 유리공 대신, 몇 번을 떨어뜨려도 다시 튀어 오르는 고무공이 되라고 한다.


바닥에 부딪혀도 곧 다시 튀어 오르는 고무공은 긍정의 자세를, 바닥에 닿자마자 산산조각 나는 유리공은 비관적 사고를 의미한다.


고무와 유리. 누구나 단번에 이해하기 쉬운 비유이지만, 막상 막다른 길 끝에 다다랐을 때 이를 떠올려 행동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왜일까?


긍정과 비관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긍정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이지만, 비관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개인의 ‘관점’에 불과하다.


‘나는 분명 고무공 같은 사람인데, 왜 상황이 나아지지 않지?’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면, 긍정을 단순히 ‘좋게 바라본다’는 ‘관점’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긍정의 진짜 의미와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관과 정면 대치하는 개념은 긍정이 아닌 낙관이다. 낙관 역시 앞날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불과하며, 이러한 관점의 변화만으로는 현실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긍정주의’라는 말을 억지로 갖다 붙여 쓰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이 말이 입에 쉬이 붙지 않는 것은,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긍정은 관점이 아닌 받아들임이다. 즉, 상황을 투명한 유리처럼 직시하는 행동이다.


사실 긍정은, 고무와 유리를 양면으로 맞댄 무적의 공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써먹어야 의미가 있는 다목적 도구, 그것이 긍정이기 때문이다.



부딪칠 땐 고무처럼,
현실을 직시할 땐 유리처럼.



나는 긍정적인 사람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회의가 드는 날엔, 그동안 긍정의 탈을 쓴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자.


긍정은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자 하는 ‘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유리처럼 똑바로 바라보고 고무처럼 두려움 없이 달려드는 행동이다.


긍정주의. 그런 이상한 말은 이제 지워버리자.



마음을 양조합니다.

마인드 브루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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