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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작 Apr 19. 2024

#28 [망측 로맨스2] 우리 같이 자요


상미 : (톡) 당신과 하고 싶은 게 떠올랐어요

수혁 : (톡) 뭘까~?


상미가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한다

수혁은 손톱을 깨물며 지켜본다. 톡이 왔다. 수혁이 웃는다


상미 : (톡) 우리 같이 자요.

수혁 : (톡) 아... 생각치도 못한 제안인 걸? 

상미 : (톡) 응큼한 생각은 말구! 그냥 난 잠이 필요해요

수혁 : (톡) 그래요, 나 인간 자장가야. 기대해요

상미 : (톡) 내일 눈 떠서 차단할 수도 있어요. 잘 자요. 오늘 고마웠어요...

수혁 : (톡) 좋은 생각만 하고 자요~


상미는 자자는 말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몇 번을 고쳤다


우리 잠만 같이 자요.

아무 것도 안 하고 잠만 같이 잘 수 있어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같이 자고 싶어요

자자!

결국 "우리 같이 자요."라고 심플하게, 건조하게 전했다

상미는 '잠을 같이' 자고 싶었다

남들은 육아에 지쳐 쓰러져 잔다고 하지만 상미는 그러지 못햇다

남들만큼 육아도 하고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는데 잠은 그러지 못했다

딱히 걱정도, 고민도 하지 않는데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잠에 방해될까봐 걱정도 고민도 안 하려 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잠이란 녀석은 좋은 남자만큼 상미에게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더 나은 잠을 위해 베개도 바꿔보고 침구도 바꿔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은 여전히 요원했다

그래서 잘 말려진, 깨끗하고 하얀 침구보다 더 안락한 누군가의 곁이 그리웠다

달콤한 잠을 잘 수 있다면 그가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혁을 자기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상미는 잠을 테스터로 선택한 것.

잠보다 일상에서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그 사이 이 날에 대해 서로가 얘기한 건 없다

상미는 민망해서, 수혁은 말 꺼냈다가 약속이 깨질 것 같아 겁을 냈다

상미는 약속장소로 나가기 전에 친정에 애들을 맡겼다

친정엄마는 현관을 나서는 상미를 세우고 뒷머리를 정돈해줬다

"예쁘다. 애들은 걱정 마."

엄마는 엄마다. 회사 워크샵이 있다고 했는데 엄마는 상미의 밤을 이미 그리고 있었다

"무슨 쉰소리야, 일하러 가는 사람에게. 애들이 나 찾으면 영통 연결해줘, 고마워 엄마."

상미는 불거진 볼을 들킬세라 빨리 돌아섰다


그들은 부산한 역 앞에서 만났다

패기로운 제안이었지만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상미는 안절부절 못했다

번화가를 선택한 것도 고요 속에 둘만 남겨지는 그 어색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적당한 곳에 가서 밥을 먹었다

술은 들지 않았다

술김에 자고 싶지도 않았고

술을 핑계로 '잠만 자는' 것 이상을 하면 안 됐다

밥을 먹고 주변 공원을 걸었다

12월의 찬바람은 다음 행선지를 독촉했지만 

상미는 차갑게 내려않은 공기를 마시며 흰 김을 뿜는 것도 좋았다

이 작은 행위가 얼마만의 경험인지 감격스러웠다

그래서인지 더 여유롭고 더 안온했다

공원에 벤치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상미 : (숨을 길게 내뿜으며) 더 길게 숨을 내쉬고 싶어요

수혁 : 소식적 담배 피듯이?

상미 : ㅋ 과거 나오나?

         한숨말고 느긋이 숨을 내쉬었던 적이 언제인가? ... 기억이 안 나네요

수혁 : 고생 많았어요 상미씨. 

상미 : 돈을 더 많이 벌고 싶거나, 아이가 잘 자랐으면 좋겠거나...그런 소원도 있겠지만, 숨 편히 쉬고 잠 편히 자고 싶은, 소소하지만 그간 내게 어려웠던 그런 것들을 얻고 싶어요. 어쩌면 남들에게는 평범한, '평범'이란 말에 가치절하 된 소중한 것들을 나도 가져보고 싶어요

수혁 : 그렇네요, 그 소중한 걸 우린 못하고 살았네요

상미 : 수혁씨 못 자요?

수혁 : 수면의 질을 얘기하는 거면 사실 잘 자요. 코도 골 걸? 하지만 필요에 의해 꿀잠을 강제하는 거지, 편하게 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상미 : (수혁을 가만 바라본다)

수혁 : ? 어렵나요?

상미 :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수혁 : ㅋ 아냐~ 정말 편한 잠은 아니라니까요

상미 : 오늘 같이 자는 거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수혁 : 여보세요! 나도 편하게 자고 싶다니까!

상미 : (수혁의 코를 쥔다) 난 옆에서 코골면 못 자

수혁 : 아니! 오늘은 아닐 거예요. 보통 술 마시거나 회사에서 팀장이랑 싸우면 골아


상미는 일어나서 앞서 걸었다

수혁이 코골이를 변명하며 쫒아나섰다


둘은 시내의 호텔을 목적지로 정했다

교외의 호텔은 여행의 기분이 날 것 같았다

오늘 잠은 일상의 잠이 되어야 했다

둘 모두 짐이 한가득이었다

상미는 만나기 전 수혁에게 당부했다

평소 집에서 입던 잠옷과 필요하면 베개도 챙기라고.

상미는 체크무늬 투피스 잠옷을 준비했고 베개와 필로우까지 챙겼다

수혁은 파자마 바지와 반팔 티셔츠, 그리고 친구가 쥐어준 디퓨저를 챙겼다

수혁은 공들여 협탁에 디퓨저를 설치했다

상미가 화장실에서 환복하고 나와 디퓨저를 봤다


상미 : 원래 그거 피우고 자요?

수혁 : 그건 아닌데 ㅎ 친구가 해보라고 하더라구요

상미 : 왜? 막 상대를 기절시킨대?

        아님 최음효과가 있대?

수혁 : ㅋㅋㅋ 최음은 뭐예요! 잠만 잔다더니 왜 분위기가 레드지?

상미 : ㅎ 어색해서. 여튼 그거 하지 마요. 난 평소 분위기 내고 싶어요. 안 하던 거 하고 싶지 않아


수혁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상미는 방 조명을 낮추고 침대로 들어갔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창을 바라보고 옆으로 누웠다. 수혁과 등지는 방향이다


수혁이 나왔다

상미가 마른 기침을 한다

수혁이 침대에 걸터 앉는다

상미가 눈을 감았다

수혁이 조명을 모두 끈다

상미는 뛰는 심장을 가만 누른다

수혁이 이불을 들추고 들어간다

상미는 필로우를 다리 사이에 끼고 무릎을 당겨 웅크린다


수혁 : 저...

상미 : 아무말 안 하면 안 돼요?

수혁 : 아... 네. 그냥 이대로 자면 되죠?

상미 : 네. 평소 자던대로 자면 돼요

수혁 : 난 딸에게 팔베개 해주고 자는데?

상미 : 옆에 스탠드에게 해줘요

수혁 : ㅎ 잘자요. 혹시 내가 코골면 옆구리 치고요. 금방 멈출 거야

상미 : 베개를 좀 높여봐요. 전남편은 그러면 안 하더라


상미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상미 : 미안해요

수혁 : 아니예요. 좋은 팁 감사. 그렇게라도 익혀서 당신 꿀잠에 보탬이 돼야지


상미의 다문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수혁 : 좋은 꿈 꿔요

상미 : 당신도.


수혁의 낮은 '당신'이란 음성에 상미는 나른해졌다.

상미는 잠에 집중했다. 포근한 이불, 건조하고 부드러운 침대보, 푹신한 베개

상미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상미는 일정한 숨을 내쉬며 잠에 집중했다


수혁은 눈을 감지 못했다

이 현실이 꿈인가 싶고 그게 아니라 더 믿어지지 않았다

수혁은 상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수혁은 상미가 쳐놓은 결계를 넘을 생각이 없었다

수혁의 입매도 부드러워졌다. 눈을 감았다



부르르 물 끓는 소리에 수혁은 눈을 떴다

상미는 옷을 갈아입고 쇼파에 앉아 창을 보고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 <morning sun>


수혁 : 잘 못 잤어요?

상미 : 아뇨, 잘 잤어요. 그러니 벌써 눈을 떴지

수혁 : 아, 못 잔 줄 알았네. 다행이에요. 어땠어요?

상미 : 뭐가 어때? 우리 뭐 했나요? ㅎ

수혁 : (웃는다)

상미 : 아무 맛도 없는 잠이었어요. 달콤하지도 쓰지도 않은 무맛 잠. 근데 좋았어요. 내가 바라던 잠이었어

         커피 마실래요?

수혁 : 부탁해요. 옷 갈아입고 나올 게요


상미와 수혁은 쇼파에 나란히 앉아 창을 보고 있다. 


상미 : 이 쉬운 걸 왜 나는 못 누리고 살까요?

수혁 : 쉽지 않아요. 어려운 거죠. 내게 자자고 제안하는 게 쉬웠어요? 어제 호텔에 들어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나요? 외간 남자와 같은 침대에 눕는 게 편했나요? 아니잖아요

상미 : 그러네요. 다 어려웠네. 그런데... 평소보다 잠을 잘 자서, 빨리 눈이 감겨서, 깊게 잠들어서 쉽다고 생각이 됐나보다

수혁 : 그럼 그 공은 저 아닌가요? ^^

상미 : 그건 인정. 정말 인간 수면제네요

수혁 : '인간 수면제'라는 게 연애에서 그다지 좋은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이번엔 큰 역할을 한 것 같네요. 

         모든 걸 주고 싶은 사람에게 모든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한 걸 줄 수 있었으니 참 다행이예요

상미 : 어제의 꿀잠은 정말 큰 선물이었어요. 난 그거면 돼요.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예요

수혁 : 더 주고 싶으면 어쩌죠? 난 아직 당신에게 더 주고 싶은 게 많아요

상미 : 난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요. 부담스러우면 거절이 잦을 거예요. 그러니 애쓰지 마세요

수혁 : 애쓰지 마라... 자연스러운 게 좋기는 하지만, 난 뭐든 잘 하고 싶어요. 사랑이 노력으로 되겠냐만은 안 하는 것보다 노력하는 게 낫다면 부단히 애 써서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싶어요

상미 : 노력해봤어요. 더 사랑하려고 노력해봤고, 옅어지는 사랑을 더 진하게 맛보려고 노력해봤고,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사랑이 맞다고 보여주고 싶어서 간, 쓸개 다 내놓고 노력도 해봤어요. 사랑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더라

수혁 : 내가 좌우명으로 여기는 말이 있어요. "인생사 케바케다. 내 색을 완성하는 붓은 내 손에 쥐어졌다."

상미 : (가만 생각하다가) ... 유명한 사람이 한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수혁 : ㅋ 네. 제가 만든 말이예요

상미 : ㅎ 그럴 줄 알았어요. 사짜 냄새가 났어요

수혁 : 헐! 멋있는 말인데?

상미 : 케바케가 뭐야, 애들도 아니고

수혁 : 꼰대세요?


상미는 외투를 걸쳐입고 수혁의 외투를 챙겨준다


상미 : (수혁의 외투를 들고서) 아이보리 코트를 입는 남자는 삶이 어떤 색일까요?

수혁 : 검정에 가까워요. 그래서 부단히 밝아지려 애쓰는 것 같기도 해요

상미 : 흑에서 백을 찾아가는 그 의지도 특별한 거죠. 난 밝은 색 코트 입는 남자 좋더라

수혁 : (으쓱) 집에 밝은 그레이 코트도 있는데 다음엔 그거 입고 나올 게요

상미 : ㅎㅎ 우리가 또 언제 볼 줄 알고? 한 여름에 코트 입게요?

수혁 : ㅎ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네요. 다시 볼 수 있다면 여름에 코트를 못 입겠어?

상미 : 한여름에 코트 입는 남자를 만날 자신은 없어요~


밥을 먹는 게 버겁다는 상미의 말에 둘은 호텔을 나와 걷다가 무릎이 저려올 때쯤 카페에서 커피와 마들렌을 먹었다. 상미의 목에 엷게 땀이 배었고 수혁은 그 목을 바라보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에 찬물을 마셨다. 해는 아직 정수리 위에서 지난한 하루일 거라 예고하고 있었다. 둘은 더 데이틀 끌 용기가 부족했다.


상미 : (손을 내밀며) 잘... 잤어요

수혁 : (개구진 표정으로) 고객님? 다음에 또 이용 부탁 드립니다

상미 : ㅎㅎ 정말 잘 잤어요

수혁 : (눈이 선해진다) 저도 잘 잤어요

상미 : 고마워요

수혁 : 둘 다 좋은 경험인데 다음을 기약해도 될까요?

상미 : ^^... 조심히 들어가요

수혁 : 네. 연락할게요

상미 : 들어가서 애에게 잘 해주구요

수혁 : 흠... 그러네요. 잊고 있었네. 마지막까지 둘만 생각하고 싶었는데...

상미 : 난 안 돼요. 잘 가요


상미는 돌아서서 걸었다. 또각또각, 단단한 구두굽이 언 보도블록에 명쾌한 소리를 냈다. 수혁은 가만 상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생각해봤다. 답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구두소리에 자신의 심장이 같이 뛰는 걸 느끼며 흡족해졌다. 수혁도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반대였지만 좀 더 자신의 발소리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고 발소리가 또렷한 것에 만족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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