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서
언제 보아도 밤 노을이 퍼지는 광경은 아름답다.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 전까지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든 일단 붉고 노랗게 물들어 서서히 기울어가는 장관을 눈 앞에 두고 서면 머릿속을 한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생각과 마음에 차곡히 쌓여 있던 각양각색의 감정들이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아련하고 애잔하고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감상만이 남는다.
영국의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웨일스 시골 동네에서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십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은 이곳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조용하고 한가롭다. 태어날 때부터 빨리빨리 DNA를 타고 나는 한민족의 정서와는 다르게 모든 게 느긋하다.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도, 심지어 강아지들도 느리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아침에 물건을 주문하고 당일 저녁에 택배기사를 기다리는 서울 사람들의 속도에 비교하자면 이곳 사람들은 천하태평이다. 주문한 물건이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 그걸로 족한 듯싶다. 조급함이라는 말이 이곳에서 쓰이기는 할까 싶을 정도다.
환경의 느긋함 덕분일까 불안했던 마음이 한결 잦아들었다. 느긋한 사람들 곁에서 느리게 지내다 보니 천천히 행동하고 여유를 누리는 것에 익숙해진다.
하루 24시간을 1,440분으로 나누어 스케줄로 정갈하게 배분하여 매 분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하는 문화, 무언가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시간을 낭비라 칭하며 죄책감을 지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삼십 년이 훌쩍 넘게 살아온 나 같은 한국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나태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즐긴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일종의 무책임, 방관 같은 일이다. 처음 며칠 동안 마음 한 켠이 불안하고 부대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효율적으로 살았는지 반성하도록 가르치는 민족의 후손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떠나온 것 자체로 큰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무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배워가고 있다. 하루 일과를 꼭꼭 씹어 체하지 않을 만큼만 소화해내고 있다. 정확히는,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고 있다. 졸리면 자고, 배가 고프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고, 걷고 싶으면 걷는다. 기분이 좋으면 웃거나 노래를 하고, 우울해지면 우울한 채로 그냥 머무른다. 내가 머리로 생각하는 '정상'의 수준에 몸과 마음을 끌어다 맞추려 애쓰지 않는다. 해야 하는 일을 만들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다. 머리는 잠시 비우고,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뒤돌아 보니, 지금까지 머리가 말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왔다. 마음이 말하는 것, 몸이 말하는 것들은 '우선순위'를 핑계 삼아 지금 당장 해내야 하는 일을 위해 희생시켰다. 이성의 힘으로 감정과 육신의 상태를 묵살했다. 의지가 항상 이겼다. 그러다 지난 두 해 동안 몸과 마음이 보이콧을 시작했다. 처음엔 몸이 말을 듣지 않더니, 끝내 마음까지 합세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각자도생을 시작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은 자동반사적으로 웃고 있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났고, 밤이 되어 졸린데 잠을 잘 수 없었다. 총체적 난국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를 잘 돌봐야 하는 건 나 자신인데, 왜 그동안 내 소리를 무시했을까. 나의 몸과 마음을 제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는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웠다. 의지와 생각이 몸과 마음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보니, 강제로라도 휴식을 해야 했다. 조금 지친 마음을 충전하러 휴가를 떠나 보자 정도의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라, 이대로 그냥 있다가는 무슨 일이 나겠다 싶어서, 살기 위해 피신을 했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더 가깝다. 요양이 필요했다.
갑자기 한국을 잠시 떠나 있어야겠다고 했을 때, 철부지 대하듯 조소한 지인도 있었고, 다녀와도 별 반 다를 게 없을 텐데 돈 낭비 말고 그냥 여기서 쉬라며 말린 이도 있었다. 구정 연휴를 직전에 둔 시점에 굳이 서둘러 떠나는 것에 대해 예의가 아니라 하기도 했다. 병원에 다니며 치료받고 약을 먹으면 금방 나을 거라고도 했다. 그들에게 나의 결정은 틀린 판단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분명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해주었을 이들의 조언(?) 덕분에 지체 없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딱히 밉상 맞게 틀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내게 필요한 건 옳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문제의 원인도, 정답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몰라서 힘든 게 아니었다. 버틸 힘이 바닥 나 버려서 고장이 났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들어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불안감에 대해 수없이 생각하고, 분석해가며 해결책을 찾으려고 누구보다 가장 치열하게 노력한 건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여행하는 동안은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생각을 떠올릴 기운조차 없었다. 머리를 통째로 드러내어 몸에서 떼어내 버리고 싶을 만큼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인공호흡이든, 산소 공급기든 그저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주는 곳으로 가자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였다. 나의 상황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고, 나의 결정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 않고, 다르면 다른 대로 존중해 줄 사람들에게, 뭐가 더 맞고 틀린 지 따져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일단 가자.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환영하는 사람들 곁으로. 그들 곁에서는 숨을 편하게,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용기와 힘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 곁에서 지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최선의 선택이자 옳은 선택이었다.
어서 와서 편한 대로 지내다 가요.
웨일스의 지인은 흔쾌히 방문을 환영한다며, 초청장까지 써 보내 주었고, 이 한마디 인사로 진짜 휴식 같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5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마음 상태를 장착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흐트러졌던 몸과 마음은 다행히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예전만큼 완전하진 않지만, 잃은 것에 비할 수 없이 흥미로운 이야기와 감상, 감정들로 내 안을 채워 왔으니 손해 나는 여정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우울하게만 보이던 회색빛 거죽을 벗어던지고, 총천연색 때때옷을 새로 지어 입은 어린아이 마냥 즐거운 마음이 되어 돌아왔으니, 잘 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잘하였다.
그렇게나 힘들었구나.
그저 이 한 마디가 필요했었는지 모른다.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이 말 한마디를, 진심으로 건네는 지음(知音)들의 눈 속에서 읽고, 따뜻한 손바닥의 온기로 느끼고, 다정한 목소리로 들으려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았는지 모른다. 5개월 후에 다시 반 바퀴를 되돌아 제자리로 날아오면서 지음들이 전해 준 위로와 공감의 말을 진작에 내가 나 자신에게 들려주었어야 했다는 걸 알게 됐다.
힘든 시간을 잘 견뎌냈어. 참 잘했다.
전에는 눈물을 쏟지 않고는 꺼낼 수 없던 말들을 이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쉬이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입가에 웃음을 띠며 나 자신을 다독일 만큼 아무렇지 않다. 잘 만난 지음들 덕에, 막혔던 숨통이 제대로 트인 덕분이다.
금쪽같은 경험이었다. 인생의 지침서 한 페이지가 지난 여정의 기억들로 채워졌다. 요즘에는 마음이 지치고 힘든 사람 - 특히나 타인의 평가나 언어폭력 때문에 마음의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 - 을 만나면 무턱대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 곁으로 가라고 말해준다. 혹여 그런 사람이 없다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에 머물거나 소소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해 준다. 존재만으로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혹은 그러한 장소로 떠나서 충전의 시간을 가지라고 이야기해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원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기억나게 해 줄 테니까. 내가 얼마나 환영받고 존중받을만한 사람인지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인생 지침 하나.
나를 잃어버린 듯한 생각이 들 때, 나를 되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
: 나의 존재 자체를 좋아하고, 긍정하고, 환대하는 사람들 곁에 머물 것
서울 도심 한가운데 노을이 지는 모습이 어느덧 아름답다. 영국 웨일스의 해변가에서 바라다보던 노을만큼이나 그윽하다. 어디에서 보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