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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리여행자 똥씨 Apr 21. 2024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의 그 중간 어디쯤

"내가 나여서 다행이다. 내가 고마워"

심리상담을 찾으시는 분들과 함께 심리작업을 해나가면서 느끼는 것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어려움이 있는 분들은, 그 기저 어딘가에는 '자기혐오/자기 비난'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마음들, 상황들, 어려움들은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기 비난 혹은 더 나아가 자기혐오의 목소리가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각기 다른 삶의 이야기와 각기 다른 마음의 어려움을 다뤄나가는 심리치료 작업은 개인에 맞게 초점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공통적으로 자기 비난과 혐오를 다루는 작업도 동시에 항상 진행하게 된다. 


자기 비난과 혐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자기 사랑? 

'스스로를 사랑하세요'라는 말이 그렇게 말처럼 쉬울까?


나 스스로의 경우를 돌아보아도 그렇고, 함께 심리작업을 해내간, 해나가고 있는 많은 분들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고,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사실 그렇다. 이 인간 세상은 원래 요지경 속이고, 이 세상도 불완전하고, 인간/타인들 역시 모두 불완전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나 자신도 거기서 예외가 아닌데, 그런 나의 불완전함을 매일매일 매 순간 경험하면서, 어떻게 그런 나를 쉽게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특히 자기 혐오과 비난이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경우에는 더더욱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맨틱한 관계에서의 '사랑'이라는 개념 

'사랑'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연애 초기에 상대방의 모든 것이 너무 좋아서 푹 빠지게 되는 그 마음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그때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콩깍지가 씌워져서, 나의 외로움과 허전했던 부분을 채워주는, 상대방의 모습에 푹 빠지게 된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의 모든 면들이 다 좋게 보이고, 나의 반쪽을 채워주는 이상적인 존재로 이상화되고, 그래서 우리는 쉽게 '나는 저 사람을 정말 사랑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연애 초반에는 원래 좋은 점들만 많이 부각돼서 보이거나 모든 면들이 좋게 보이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초반에 상대의 '좋게 보였던 면들/매력포인트들'도 서서히 그 사람의 '단점' 혹은 '나를 거슬리게 하는 면'들로 보이게 되기 마련이다. 점점, 미움/실망의 감정과 함께, 애증의 양가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서도 서로의 소중함 또는 관계의 소중함도 느끼면서, 상대의/서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그 사이에 내가 느끼는 불편함 들도 '감수하면서',  '노력'을 하며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하는 건지, 정 때문에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지' 헷갈려하기도 하고,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마음의 정의를 다시 내리게 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래서 그 흔히 떠올리는 연애 초반의 불같은 '사랑'의 감정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은 힘들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나의 부족함을 매순간 경험하고 그런 부족함들과 싸우면서 살아왔는데, 그런 나를 연애 초반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대해주라고? '스스로를 사랑하세요'라는 메시지는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느껴져서, 시작도 하기 전 포기하고, 실패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럼 자기혐오와 비난에 더 갇혀서 나오지 못하게 될 가능성만 높아지고.


혐오와 사랑의 그 중간 어딘가

그럼 그렇게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자기 사랑' 보다 좀 더 현실 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메시지는 뭘까?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비난의 그 중간 어느 쯤의 개념은 뭘까? 


불완전한 부족한 나의 모습을 이해, 그 모습을 그냥 수용, 그런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오며 힘들었을 나 자신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 그래서 그런 힘들었을 나 자신을 따뜻하게 돌봐주고 싶은 마음, 즉 자기 자비, 이런 메시지들이 좀 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하지 않나? 


나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을 인간의 일부라고 그냥 인정해 주고, 

나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을 '참아주며 살아가는 방법'을 연습해 보고, 

그러다 나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과 그대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러다 나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을 자비롭게 바라봐주는 법도 천천히 깨닫고, 

불완전한 나로 살아가느라 힘들었던 나를 감싸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방법을 배우고, 

더 나아가게 되면,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그래도 내가 나여서 다행이다라고 스스로 칭찬을 해줄 수 있는 순간들도 맛보게 되고.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불완전한 나를 챙기는 나에게 고마워지기도 하고.  

 나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을 좀 어여쁘게, 소중하게, 때로는 고맙게 봐주게 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그게 '나를 사랑하는 것'의 정의가 되기도 하고. 


내담자 분이 가르쳐 준 것 

얼마 전 오랫동안을 자기 비난, 자책, 혐오로 힘들어하시던 한 내담자분이 '이렇게 힘든 순간 속에서 나를 그래도 달래주며 하루하루 보내려고 하는 그런 내가 고마웠어요'라는 고백을 세션에서 하셨다.

자기 비난/자책이 익숙한 내담자가 '나 스스로가 고마웠다'는 순간을 경험하셨다는 것이 큰 감동 포인트였던 세션이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최근 몇 년 전까지는 의심도 안 하고, 당연시하게 여기며, 항상 나를 자책하고, 비난하고, 채찍질하는 나와의 싸움 속에 살았던 것 같은데, 지난 몇 년간 극단적인 '자기 사랑'이 아닌 위의 저 단계를 서서히 밟아 나가는 내면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최근부터는,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었던, '아 그래도 내가 나여서 다행이다'라는 순간들도 더 많이 경험하게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나를 참 든든하게 안전하게 따뜻하게 해 준다. 


그런데 나는 '내가 나여서 다행이다'까지였지, 내가 나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해준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내담자 분의 저 나눔을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why not? 


'내가 나여서 다행이다'.. 보다 '내가 고맙다'라는 말이 훨씬 더 따뜻하고 포근한데? 


내담자 분을 통해 감동뿐만이 아닌 큰 배움을 얻은 세션이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과 글도 정리하게 되었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타인들과 누구나 불완전한 자기 자신과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래도 그 불완전한 내가 나라서 다행이야. 나를 챙겨줄 수 있는 내가 고마워. 이것이 결국 현실적인 자기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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