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난다 화가 나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잡생각이 있나요? 샤워를 하거나, 그저 멍 때리고 있거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을 때 불쑥 떠오르는 생각들 말이에요. 원래 그 생각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이 나도 모르게 도달한 지점 같은 게 있지 않나요?
혹시 그런 잡생각의 ‘단골 주제' 같은 것이 있나요?
저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머릿속으로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종종 있어요.
화가 날만한 일이 생겼을 때,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하지만, 저는 화날 일이 없는데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워하곤 합니다. 화를 내기 직전에도 그 전날에도 그 전전날에도 화가 날만한 사건은 없었고,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론) 제 마음도 평온한 상태였는데 말이에요.
머릿속으로 화를 낸다는 건 이런 거예요. 예전에 있었던 불쾌한 사건들, 혹은 불쾌한 사람과의 대화 같은 것들이 불쑥 떠올라요. 그리고 그때 제가 했었다면 좋았을 말이나 행동을 떠올려 보는 거예요. 머릿속에서 재연되는 갈등 상황에서는 현실의 제가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으로 상대를 보기 좋게 한 방 먹이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 머릿속 시뮬레이션은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에요. 의식적으로 그 사건들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과 씨름을 하다 문득,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라고 깨닫고 멈추거든요.
게다가 제가 떠올리는 사건들은 최근의 일도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이거나, 혹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대화를 가상으로 떠올릴 때도 있어요.
어린 시절 들었던 상처가 되는 말들, 사회 초년생 시절 지금보다 어리고 미숙했을 때 나를 향한 공격에 속수무책 당했던 기억, 당시에는 너무 놀라고 떨려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그저 넘어갔던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예기치 못한 때에 불쑥 떠오릅니다.
분노 상황 발생 >> 화가 남 >> 분노를 표출함
이 아니라,
분노 상황 발생 >> 참음 >> 상황 종료 >> 일상생활 >> 느닷없이 화가 남!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제가 컨디션이 좋고, 건강할 때에는 괜찮아요.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지쳐있을 때면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 못했던 말이나 행동을 머릿속에서 아무리 반복한다 한들 후련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머릿속으로나마 화를 내고 있는 것은 감정소모가 큰 일이기도 하고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서 오래도록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아간 정신의학과 선생님의 북토크에서 이런 말을 들었어요.
‘당신이 분노라고 생각하는 그 감정이 사실은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나 불안일 수 있다’고요.
나에게 위협을 주었던 상황이 반복될까 봐 두려운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격한 감정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거예요. 예전에 지나간 일에 대한 분노가 해소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했을 때 그때처럼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연습해 보는 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땐 그 생각을 끊어내고, 대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안전하다. 그 상황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른이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다.
이 방법이 완벽하진 않아도, 적어도 저에게는 도움이 되었어요. 화가 난 게 아니라 불안한 것일 수도 있어요. 미안한 게 아니라 미운 것일 수도 있고요. 어떤 감정인지 알아야 어떻게 해소할 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른이라고 해서, 40여 년을 살며 이런저런 감정들을 겪어 봤다고 해서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은 제대로 다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불편해서 얼른 사라져 버리길 바랐어요. 꾸역꾸역 눌러 억제하거나 무시하기도 했고요.
자기의 감정을 잘 알고, 스스로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얽혀 있는 감정의 실체도 모른 채 다른 사람에게 냅다 집어던져서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의 잡생각 단골주제는 무엇인가요? 반복해서 느끼는 감정이 있다면, 지나치지 말고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이유가 없는 감정은 없을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도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