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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Dec 24. 2017

내가 너에게 '만져졌을 때'

[ 영화식사 011 ] 문라이트(Moonlight, 2016)

영화 <문라이트> 스틸컷 이미지 


날 만진 건 너 밖에 없었어 


<문라이트>에서 샤이론(트래반트 로즈)이 케빈(안드레 홀랜드)에게 힘겹게 건넨 고백은 한동안 감촉에 대해 상기해보는 계기가 됐다. 십년 넘게 샤이론이 다른 누구에게도 대리하지 않던 케빈의 "만짐"은 어떤 감촉이었을까. 내가 너를 만지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만진다는 것. 십년 사이 비대해진 샤이론의 두꺼운 육체에서 드러난 그 고백은 의외로 가녀렸는데, 보고싶었다거나 여전히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보다 그 여린 한 마디가 마치 짐승이 토해낸 상처처럼 느껴져 더욱 진심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과거에 나를 만졌던 몇몇 타인들의 기분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타인의 기분을 알아맞추는 건 감도 오지 않는 일이라, 그저 내 살을 직접 만져보며 '만져진다'는 게 어떤 건지 짐작만 해볼 뿐이었다. 

나를 보던 그 사람의 눈빛, 포개오던 입술, 나른한 말들은 그날 머리를 기댔던 납작한 베개처럼 심심해졌지만, 서로를 만지던 감각, 두 개의 살갗이 서로를 원하고 포섭하고 설득하던 그 과정은 비록 샤이론처럼 처음은 아니더라도 시시했던 인연보다 특별했던 순간이 틀림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샤이론의 "만져진다"는 그 감각이 얼마나 긴 시간 그를 버티게 한 감촉이었는지. 또한 얼마나 긴 시간 그를 괴롭게 한 기억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백인인 자, 백인이 아닌 자. 이성애자인 자, 이성애자가 아닌 자 그 사이를 용납하지 않는 세계. 남과 여, 오로지 두 개의 성 중 하나만을 존재의 고유 성질로 취해야하는 이원적 젠더 규범을 거부한 주디스 버틀러는 이러한 이분법이 '살아낼 수 없는 폭력'이라고 표현했는데, 샤이론은 그러한 폭력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반대로 내면을 감출 수 있는 폭력의 세계에 몸을 담근다.


영화 <문라이트> 스틸컷 이미지


내가 너를 만지는 순간 나 역시 너에게 만져짐으로써 자아와 피아를 가르는 이분법적 대립을 거부한 데리다의 말은 옳았다. '호모'라는 단어는 외부세계로부터 샤이론을 격리시키는 낙인으로 작용하는데, 이러한 단절을 과감하게 깨고 다가온 후안(마허샬라 알리)이 외부세계의 경계 끝에서 어린 샤이론(알렉스R. 히버트)을 보호해주는 역할이었다면, 케빈은 샤이론의 정체성에 가장 가까이 닿은 상대였고, 샤이론에게 있어 케빈에 의해 '만져진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관계가 아닌, 타인과의 경계를 허문 첫 경험이 아니었을까. 


똑바로 바라보자. 우리는 서로에 의해서 허물어진다


어쩌면 평생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아프고, 한편으론 이 생을 버틸 힘이 될 그 감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다가 주디스 버틀러의 글 중 가장 정확한 표현을 찾아냈다. 


"똑바로 바라보자. 우리는 서로에 의해서 허물어진다. (중략) 누구든 항상 온전한 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누구나 온전하길 바라거나 실제로 그럴 수는 있지만,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면하면서 그 감촉의 향기나 느낌, 아니면 그 감촉에 대한 예상이나 그 느낌에 대한 기억 때문에 허물어진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324p.
 
나와 네가 필연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온전해야 하는데, 세상에 온전한 존재는 없으므로, 우리는 서로에 의해 허물어져야 한다. <문라이트>가 아름다운 이유는 온전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 기꺼이 허물어지고자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 아닐까. 분명하지 않은 것들 중에 분명히 중요한 게 있다고, 달빛에 두둥실 떠오른 어린 샤이론을 보며 확신했다.

영화 <문라이트> 스틸컷 이미지

십년 만에 만난 두 사람에게 더 이상의 경계는 없기를 바라며.

영화식사 열한번째 레시피, 

<문라이트>에서 케빈이 샤이론에게 만들어준 뽀요 알란 플란차

뽀요 알란 플란차 레시피

준비물: 닭가슴살, 양파, 흰 쌀밥, 검은콩, 피망, 카옌 페퍼, 라임, 후추, 파슬리, 다진 마늘, 소금, 깨


1. 납작하게 두드린 닭가슴살을 비닐팩에 넣고 카옌페퍼(조금만), 후추, 라임(한 개), 다진 마늘(티스푼)을 넣고 1시간 정도 재운다. 

2. 작게 썬 피망과 삶은 검정콩을 기름에 볶아 알맞게 간하고, 양파도 타지 않을 정도만 볶는다. 흰 밥도 소금과 깨를 살짝 간한 뒤 모양을 내 준다. 

3. 재운 닭가슴살을 미리 달궈둔 팬에 충분히 구운 뒤 그릇에 담으면 완성. 


* 해당 레시피는 Binging with Babish의 레시피 영상을 참고, 조금 변형하였습니다. 


영화 <문라이트> (Moonlight), 2016 


흑인이자 동성애자인 소년 샤이론이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베리 젠킨스 감독의 영화. 샤이론이 어린 '리틀'이었을 때, 10대로 성장했을 때, 그리고 그 후 10여 년이 지나 '블랙'이 되었을 때 이렇게 세 개의 축으로 시간이 진행된다. 포스터는 이러한 샤이론의 세 가지 모습을 겹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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