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식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녀 Feb 11. 2018

따라하기엔 너무 어려운 명대사

[ 영화식사 016 ] 12인의 성난 사람들, 1957

혹시 나처럼 우스운 생각을 해본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에서 본 명대사를 실생활에서 따라해 보고 싶단 생각 말이다. 단순한 장난이나 소위 말하는 '드립'이 아니라 정말 진지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어릴 적에만 할 줄 알았는데, 다 크고 나서도 종종 우스운 공상을 하고 있다. 물론 정말 그렇게 했다간 못해도 5년 치 흑역사 예약이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 빈민가 소년의 친족살해 혐의를 두고 12명의 배심원들이 토론을 한다. 배심원8 (모든 배심원들은 이름이 나오지 않고 숫자로 표기된다) 헨리 폰다를 제외한 나머지 배심원들은 각기 나름의 근거로 소년의 유죄를 주장한다. 빈민가 소년이라서, 증인이 있어서, 혹은 오후에 야구경기를 보러가야 해서. 헨리 폰다는 참을성 있는 토론을 통해 온갖 편견으로 가득 찬 배심원들과 외롭고 치열한 언쟁을 이어간다. 휴식시간에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배심원 한 명이 헨리 폰다를 위로하듯 “엄청난 사람들이죠?”라고 하자 헨리 폰다가 대수롭잖듯 대답한다. “평범한 사람들이죠.”


기회가 된다면 나도 따라하고 싶은 명대사가 바로 이 대사였다. 야구경기 때문에 한 소년의 유죄를 5분 만에 결정짓는 사람, 소년이 빈민가에 산다는 이유로 범죄자임을 확신하는 사람,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유죄라고 하니 엉겁결에 따라가는 줏대 없는 사람. 이들을 “평범하다”고 규정하는 그에게서 내면의 강함과 용기가 느껴졌다. 만약 내가 헨리 폰다였다면 편견과 악의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가스통을 들고 화형식을 치르는 어버이연합이나 동성애는 사탄행위라 부르짖는 종교인들을 보고 나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평범하다는 말은 예컨대 나를 포함해 나와 사상을 함께 하는 주변인에게 해당되는 수식이었다. 여자는 삼일에 한번 씩 패야 한다는 일베, 여성혐오적 표현으로 인기를 얻는 유투버가 나처럼 평범한 존재라고 보기엔, 너무나 괴물 같고 부조리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편견과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선 그런 사람들. 즉 나의 상식과 정치적 올바름을 달리하는 사람들 역시 (나처럼) 평범하다고 보는 냉소와 담대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외국인 노동자와 노숙자를 사회에서 변형된 괴물로 규정해야만 안심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사이코패스', '일베충', '페미나치' 등으로 규정함으로써 설득보다 편리한 분리를 택하는 세상에서,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헨리 폰다의 저 말은 현재로선 따라하기엔 너무 어려운 대사다.



배심이 끝난 뒤 땀에 젖은 셔츠를 식히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피자에 시원한 맥주를 마셨을 헨리 폰다를 상상하며.

영화식사 열여섯번째 레시피, 떠먹는 피자 그리고 맥주




12인의 성난 사람들, 1957


감독: 시드니 루멧

출연: 헨리 폰다 외


12명의 평범한 배심원이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한 소년에 대해 유·무죄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미국식 민주주의와 사법제도의 승리를 보여주는 밀실 드라마. 브로드웨이와 TV에서 이름을 날렸던 시드니 루멧의 데뷔작으로 연극적인 세팅을 흡입력 있는 영상으로 옮겨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12명의 노한 사람들 [12 Angry Men] (세계영화작품사전 : 법정영화, 씨네21)




매거진의 이전글 그렇게 조용히 폐경을 기다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