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19 ] 레이디 버드Lady Bird, 2018
* 브런치 무비패스로 다녀온 <레이디 버드> 시사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자신의 이름을 ‘레이디 버드’(Lady Birds)라고 지었다. 만약 그녀가 새라면, 날지 못하는 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언제든 날아가 자기가 있던 곳을 버릴 수 있는 새가 아니라, 적당히 자신의 영역에 두 발이 묶여 사는 새가 어울린다고. 날 수 있는 새를 동경하는 날지 못하는 새가 그녀와, 그리고 우리와 더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역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을, 내 삶을 바라보는 영역이 달라지는 시기의 이야기다. 볼 수 있는 세상이 점점 넓어지고 그만큼 더 멀리까지 내 시선이 닿을 때. 눈길 닿는 곳들이 멀미가 날 정도로 너무 많아져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크리스틴은 자신이 나고 자란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에 있는 대학에 가길 원하는데, 학업이나 다른 목표가 뉴욕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새크라멘토를 떠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크리스틴은 좀 더 넓고 먼 곳으로 자신의 영역을 옮기길 원한다. 마치 날지 못하는 새가 날아가는 새를 동경하는 것처럼.
하지만 크리스틴이 지겹다고 말해온 모든 것들은 그녀가 더 먼 곳을 보느라 알지 못했던 것들로 가득했다. 3년 동안 다닌 고등학교에 뮤지컬부가 있었는지도, 은퇴한 아버지가 우울증 약을 복용해왔는지도, 집안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크리스틴은 몰랐다. 이러한 사실들은 영화에서 클라이맥스처럼 한 번에 드러나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그리고 별 대수롭잖게 드러난다.
큰 긴장감 없이 진행되는 그 전개가 좋았다. 이 영화는 엄청난 충격이 밝혀지고 그 후 문제가 해결되면 다 같이 호호 웃으며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성장담이다. 우리가 겪었듯 사람이 성장하는 건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해치우는 게 아니라 잔잔한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이기에. 마치 아기가 매일 갖고 놀던 장난감이 언제부턴가 빨간색이란 걸 알게 되고, 세모, 네모, 동그라미 모양이란 걸 알게 되고, 나중엔 그것이 나무로 만들어진 블록인 걸 알게 되듯, 크리스틴이 점차 깨닫는 것들은 천천히 그녀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뉴욕처럼 훌쩍 떨어진 곳이 아닌, 제자리에서.
뉴욕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크리스틴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엄마도 새크라멘토에서 자신과 같은 풍경을 보았는지 묻는다. 크리스틴은 이제 엄마가 바라보는 풍경, 엄마의 시선이 닿았던 영역에 눈을 맞춘다. 답답했지만 그래서 편안했던 자신의 둥지에 대한 크리스틴의 애정이 비로소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녀는 날지 못하는 새다. 멀리 떠나왔지만 언제든 다시 돌아갈 곳이 있기에, 레이디버드는 날지 못하는 새가 맞다.
크리스틴이 뉴욕에서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기를 바라며.
영화식사 열아홉번째 레시피, 스크램블 에그 (반드시 익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