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지나기 전에 이어 쓰는 빅보스 스토리.
4년이나 지난 이야기지만 빅보스 드라마의 결말이 어찌 되었냐 하면.
그러니까 에헴 바야흐로 사 년 전에 말이지,
그러니까 그 그 내가 여직 인턴이고 그때 영국인 빅보스가 등장해서 우리를 혼란하게 해 버렸단 말이지.
그래서 말이지.
그런 일이 있었다. 즉흥적인 일처리 방식과 눈치 보지 않고 필터링 없는 직설화법으로 핀란드인들과 맞지 않는 일하는 방식으로 팀원들을 대하는 영국인 보스가 등장했고 고요한 숲같이 평온하던 팀에 드라마가 생겼었더랬다.
불같은 빅보스는 과연 핀란드 호수의 찬물에 냉수 샤워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핀란드 호수 옆의 숲을 태워 호수를 말릴 것인가 두고 보자 하며 글을 마쳤던 기억.
궁금하신 분들 참조: https://brunch.co.kr/@finjaja/20
결론부터 말하자면 빅보스는 냉수 샤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처리를 주먹구구식으로 하시던 영국인 보스는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팀의 불만이 고조되어갈 즈음, 팀 내 번아웃 증세와 불안 증세를 겪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사내 병원의 의사를 통해 인사팀에 소식이 전해졌다. 마침 그 시기에 매니저와 팀에 대한 사내 평가를 하는 타이밍이었는데, 영국인 보스가 사내 최저 점수를 받게 된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여러 곳에서의 안 좋은 평가 때문이었는지 결국 영국인 보스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뒷모습을 뒤로하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주변에 본인이 떠나는 이유는 오로지 헬싱키팀 때문이라며 원망 섞인 푸념을 잔뜩 늘어놓은 채.
그렇다고 핀란드의 승리다!라고 하기엔 부상자와 떠난 자들이 많았다.
20-30대 팀원들이 제일 앞서 퇴사를 했다. 아주 갈릴대로 갈리다가 에잇 퉤, 하고 나간 이들도 있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해 병가를 길게 내다가 다른 직장으로 떠난 이들도 있었다.
존버 정신과 함께 ‘일은 일이지’ 마인드를 가진 분들, 또 여기에 연세가 있어 앞뒤 안 가리고 막 나가던 영국인 보스조차 막대하지 못한 나이대의 분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주목할만한 핀란드 회사의 문화는 다음과 같다.
직원의 건강이 우선이요, 일은 나중이다.
문제가 확실해지면 고쳐보려고 노력은 한다.
직원의 건강이 우선이요, 일은 나중이다.
이곳에서 직원이 회사 생활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어 번아웃 증세를 겪게 되면 이를 겪는 직원은 환자로서 법적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의사가 진단하길 번아웃이 확실하다는 진단서를 써주면 바로 그날부터 효력이 있어 그날부터 회사를 쉬어도 된다. 회사에서는 이를 질환으로 인정해주고 당일부터 병가를 허가해줘야만 한다.
법적으로 보호받는 것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보호받는다. 그 뜻은 내가 번아웃이 와서 쉰다면 팀 내에서 일이 많아질지라도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육체적 스트레스와 다를 바 없으므로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이해해주고 걱정을 앞서 하는 편이다.
실제로 그 당시에 번아웃이 와서 일을 쉬게 된 나의 상사 때문에 내가 아주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는 내용을 지난번 포스팅에 썼었는데, 다들 그의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렸지 그 누구도 일이 되지 않아 곤란한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팀 전체적으로 팀원이 충분히 건강하게 돌아와야만 우리와 롱런할 수 있으니 충분한 시간을 주자는 분위기였다. 그가 복귀했을 때에도 천천히 시작하면 좋으니 다들 나서서 도와주려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
확실히 이곳에선 전반적으로 삶을 즐기기 위해 일한다는 철학이 관통한다. 내 일상을 일이 방해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뭔가 제대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으면 고쳐보려고 노력은 해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보자…
영국인 보스 때문에 팀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고 번아웃 증세로 병가를 떠난 직원들이 많아지고, 곧이어 이어진 직장생활 관련 서베이를 통해 당시 문제가 많던 팀의 매니저가 사상 최악의 점수를 받으면서 외부 세러피 컨설팅 팀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다. 팀을 나눠서 각자 현재 문제점이 뭔지 파악하고 이것이 나아지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논의했고, 그 결과에 따라서 업무 보고 방식이나 공유 방식을 조정했다.
물론 아무도 말은 안 했지만 빅보스의 문제가 제일 컸다. 계획 없이 일을 던지는 습관, 모든 걸 급박하게 단숨에 진행하길 원하는 태도, 기존 작업에 대한 무시와 괄시, 제품에 대한 낮은 이해도가 아마 그 빅보스의 가장 큰 부실함이었을 텐데 그래도 대놓고 면전에 다들 그런 말은 못 하고 팀 내에 누가 무얼 하는지 서로 공유하고 하는 일에 대해 미리 계획성 있게 대처하길 바란다는 제시를 내놓았다.
인사팀에서는 사상 최저의 매니저 점수를 기록한 사태를 파악하려고 팀원들 각각 1:1 미팅을 진행했고 이런 분위기가 빅보스에겐 상당한 압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연말에 사비를 털어 작은 초콜릿과 손수 적은 카드를 선물하기도 하고 나름의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했다. 나는 핀인이 아닌 같은 외국인 입장이어서인지 막내라 편해서인지 다른 이들에게 말 걸기가 뭐한 상황에서는 내게 와서 본인의 사생활을 터놓거나 - 본인 친구 중에 누가 삼성가에 시집을 갔다며…? 안 들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들을 수 있는) 핀란드 날씨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곤 했다.
짠해…
하지만 일터는 일터다. 나의 일터에서 나의 일에 대해 괄시받고 무시당했을 때 생기는 생채기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래서인지 달콤한 초콜릿도 팀원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고 작았다….
회사 자체에서 이 문제를 고치기 위해 워크숍을 열고 모두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하는 제스처는 인상 깊었다. 외부 컨설팅 전문가가 들어와 이야기를 들어보고 앞으로의 길을 다 같이 정해보자는 그 과정에서 한바탕 성토대회가 벌어지며 다들 어느 정도는 마음이 풀렸던 것 같다.
하지만 회사는 하나의 사회다. 다수를 힘들게 한 문제가 이렇게 쉽게 풀릴 일이 없지.
문제의 빅보스가 떠나고 다들 속 시원하던 것도 몇 달.
새로운 빅보스가 자리 잡으면서 팀 내 대대적인 인사 정리와 조직개편이 이어졌고, 나를 포함한 다수가 다른 조직으로 옮겨졌다. 새로운 빅보스가 팀 구조를 바꾸면서 새로운 보스들이 뒤따라 팀에 들어왔고 지금 그 팀의 모습은 이전과 매우 다른 모습이 되었다. 이 구조 변경은 약 2년에 걸쳐 일어났고 그 사이 회사를 떠난 이들이 몇몇 된다. 큰 회사들이 다들 그러듯, 많은 이들이 떠나고 새로운 이들이 들어오고 회사는 그대로 건재하다. 촘촘하게 짜 놓은 시스템에서 작은 몇 개의 조직을 떼고 붙이는 동안 그 자체의 고유함은 유지되듯, 회사의 조직 자체는 그대로 건재하고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겪으면서 동료애가 짙어진 오래된 동료들 사이에서의 좋은 추억만 남았다.
이후 옮겨진 팀에서 나는 사업부를 또 옮겼고, 그럼에도 당시 그 힘든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과 여전히 좋은 친구로서 동료로서 지낸다. 어쩌다가 회의에서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사업부가 달라도 규모가 큰 프로젝트에서는 종종 만나기도 하는데, 이전의 전우애를 발휘해 호흡이 척척 맞아 일하기도 수월하다. 그리고 늘 ‘miss our good era.’라며 우리의 좋았던 옛날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꼭 나눈다. 힘들었던 기억은 꼭 잊고.
새해가 밝았다.
모두들 힘들었던 기억은 잊고 좋은 기억들만 남긴 채 2021을 보내버리시고, 좋은 기운이 가득한 2022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에게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다음엔 다시 연애 이야기로 살짝 돌아가 보렵니다.
핀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