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그거'는 무엇일까. 1번, 돈. 2번, 과자. 3번... '그것'은 빈 물컵이다. 저녁 식사 시간, 5학년 작은 아들이 식탁에 있던 컵을 들고 정수기로 간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고1 큰 아들이 동생에게 몇 마디를 한다. 그런데 왠지 동생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나는 국을 뜨다 뒤를 돌아본다. 코 앞에서 큰 것이 작은 것의 얼굴을 마치 악력으로 사과 터트리기 하듯 쥔 채로 노려보고 있다. 작은 녀석은 얼음이 되었다.
"야! 뭐 하는 거야! 무슨 컵 하나 가지고. 앉아! 오 주여..."
1초. 2초. 3초.
"야 이 새끼야 눈깔 똑바로 안 떠?"
"또 뭐야?"
"아니 이 새끼가 눈을 똑바로 안 뜨잖아!"
"아니 얘는 말을... 시끄러워! 조용히 하고 밥 먹어!"
"야! 맞짱 뜰까?" 큰 아이의 눈이 이글거렸다.
풉. 맞짱. 키가 30센티미터나 차이 나는 다섯 살 어린 동생과의 맞짱이라. 아들아, 맞짱은 조건이 비슷한 사람끼리 하는 게 아닐까. 동생이 눈을 똑바로 안 뜬다고? 세상에! 너 초등학교 때를 생각해 봐라. 5학년 말에 사춘기 와서 장난 아니었잖아? 말을 삼켰다.
"야, 딴 데 가서 울어. 밥맛 떨어지게. 사내자식이 눈물은."
주방에서 나와 보니 작은 아들이 식탁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키고 있다. 동생의 눈물로 자신의 승리를 확정 지었다고 생각했는지 큰 녀석의 목소리는 진정되어 있다. 그런데 밥맛이 떨어진다? 사내자식은 울면 안 된다? 큰 아들아, 조금 꼰대스럽구나...
이 상황이라면 오은영 박사는 어떻게 했을까. 무엇이 현명한 걸까. 정답인 걸까. 큰 녀석이 심했다. 진정한 급발진이었다. 동생에게 득달같이 달려든 것도, 거칠게 말하고 행동한 것도, 거기에 엄마는 개의치 않는 것도, 모두 잘못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단 그 상황을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정신없이 회사 일을 끝내고, 두 녀석을 위해서 초집중해서 초고속으로 밥을 차렸다. 다다다다 야채를 썰어 볶고, 요즘 유행이라는 카레를 만들어 토핑을 했다. 갖은 김치를 종류별로 다 꺼내고, 시래깃국은 식지 않게 그릇까지 데웠다. 큰 아들 좋아하는 참기름 휘휘 두른 명란젓과 작은 아들이 좋아하는 치즈 듬뿍 김치볶음밥까지. 그러니까 제발 닥치고 먹자.
그러나 작은 아들은 멍한 눈으로 한 수저도 뜨지 않았다. 형에게 몰매를 맞을까 봐 눈에 힘은 풀어져 있었지만 나름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아들, 지금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이따 먹자." 나는 아이의 등을 감싸 안았고, 아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뭐냐! 재수 없다, 그치? 지금까지 우리가 자기 사춘기라고 얼마나 봐줬는데! 이제 우리 oo이도 6학년 되는데!"
큰 아들이 학원 간다고 집을 나서고 10초 후, 나는 작은 아들의 얼굴을 살피며 다가섰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오은영 박사님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뭐라 하실까.
"나 엄청 배고팠는데. 나 김치볶음밥 먹을래..." 다행히 아들은 뾰족하게 굴지 않았다. 뒤늦게 엄마인 나에게 화풀이를 해댔다면 아마도 나는... 카페로 갔을지도 모른다.
사실 큰 녀석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꽤 많이 온순해졌다. 눈에 살기가 있었던 중3때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동생과도 웬만하면 부딪히지 않았다.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희망적이었다. 오늘의 꼬라지 상황은 간만의 일이었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따로 조용히 타이를 것이다. 듣지 않겠지만. 그런데 가만, 작은 녀석은 형 컵을 쥐고 왜 고집을 부렸을까. 정말 별 것도 아니었는데. 고집부릴 일이 아니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본인도 납득되지 않으면서 괜히 똥고집을 부린다? 왠지 나도 한번 눈을 치켜떠 본다? 이것은, 이 가시감은! 얼마 전, 수년 만에 간 노래방에서 작은 아들은 10센치의 노래를 읊조렸다.
중2 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 이 됐을 무렵
쓸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하지만 미안해 이 넓은 가슴에 묻혀어~~
다른 누구를 생각했었어어~~
미안해 너의 손을 잡고 걸을 때에도
떠올렸었어 그 사람을~~
2년 전, 겨우 키 165 언저리였던 큰 아들이 하루종일 불러 재끼던 노래였다. 그러니까 작은 아들아, 너도 사춘기구나...? 한 명 진행 중인데 다른 한 명이 또. 하늘이시어를 부르짖으려는 순간, 돌연 내 안이 잠잠해졌다. 아이들이 둘 이상인 집은 보통 비슷한 시기 혹은 동시에 사춘기를 겪을 것이다. 나만 특별히 운이 나쁜 것이 아닌 것이다. 큰 아들이 6학년 때 확 멀어졌던 것이 생각났다. 안돼! 작은 녀석까지 한 순간 몸과 마음이 멀어지게 할 수는 없다. 많이 안아주자. 예뻐해 주자. 함께 시간을 보내자. 다짐의 말들이 정신없이 튀어나왔다.
작은 아이의 신체가 확확 커지기 전에, 그래서 진짜 형아와 맞짱을 뜨기 전에 큰 아이의 품성이 좋아지기를, 나아지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큰 아들아, 멀리 가라. 동생이 온다. 휘휘~ 떨어져라. 그리고 그때까지 제발 나의 갱년기는 유예되기를. 일단 다가오는 방학을, 이 겨울을 잘 지내길. 그렇게 바로 눈앞의 미래만 보면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거의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