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 Thomas More,《Utopia》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방글라데시라는 나라에 편지 한 통을 부쳤다. 필리핀이나 태국 근처 어딘가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정도로 일말의 관심조차 없던 나라. 방글라데시는 이런 다수의 무관심을 틈타 저명한 포토저널리스트인 샤히둘 알람을 구속했다.
열악한 교통안전으로 학생들이 죽고 다쳤다. 학생들은 도로 안전권 확보를 위한 평화 시위를 펼쳤고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샤히둘 알람은 정부의 과잉진압을 페이스북 라이브로 생중계하고 외신에 알렸다. 그런 그를 팔짱 끼고 지켜볼 정부라면 애초에 무력진압 같은 부정의는 없었겠지. 샤히둘 알람은 곧장 체포됐고 고문당했다.
영화에서 흔히 접했던 우리네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지금 우리네 사정은 그때와는 퍽 달라서,
시간은 공평히 전 세계에서 잘도 흘러가지만 어느 곳의 과거가 어떤 곳에선 현재이기도,
어떤 곳의 현재가 또 어느 곳에선 다가올 미래이기도 해서, 당혹스러웠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까지 생기진 않는다. 그저 당혹감 정도.
앞으로 또 30년이 흐른 뒤, 방글라데시는 어떤 시기를 살고 있을까. 그땐 우리가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한국의 지난 1987년처럼 방글라데시도 오늘을 이미 극복한 과거로 기억할 수 있을까. 방글라데시 시민들은 조금이나마 더 공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누리게 될까?
우리가 벗어나려는 현재는 과거엔 목적지였고, 어딘가에선 여태 그렇다. 그때 꿈꾸던 유토피아는 지금 우리가 그리는 유토피아와는 또 다르다. 내가 그리는 이상향과 내 옆사람이 꿈꾸는 이상향 역시 다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관심을 가지는 일.
방글라데시는 지금, 우리가 겪었던 과거로 고통받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는 일. 앰네스티에서 방글라데시 정부에 탄원편지를 보내달라는 메일이 왔다. 그런 연유에 난데없이 방글라데시 내무부장관에게 시민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탄원의 글을 부치게 된 것이다. 거금 18,000원을 들여서.
남의 나라 일이라 치부하면 주제넘을 수도,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함이라 여긴다면 마땅할 수도.
탄원서를 작성하고 우체국에 들리는 정도의 아주 하찮은 수고를 들였을 뿐인데, 희미하던 방글라데시의 존재가 일순간 굳건해진다.
포토저널리스트는 여전히 갇혀있다.
토머스 모어가 무려 1516년에 꿈꾸던 《유토피아》 역시 2018년의 내가 그리는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당함과 불평등이 깡그리 삭제된 듯 묘사된 그곳을 동경하게 된다. 실존인물이 등장하는 턱에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독자들은 혼란스럽기도 할 테지만 그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묘미다.
정말 그런 나라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마음속 깊이 묻어둔 우리 모두의 이상을 툭, 건드린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다녀온 현자를 만나 그 사람이 아는 유토피아의 모든 것을 전해 들었다. 책은 본격적으로 유토피아를 설명하기 앞서 당시의 부조리를 토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유토피아에 대한 내용만큼이나 이 서론 부분 또한 흥미롭기 그지없는데, 1500년대나 지금이나 우리가 저지르는 아둔한 실수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유토피아에서 금과 은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많은 지면이 소모되었다. 반짝이는 돌덩이는 살아가는데 하등 필요치 않은데도 단지 희귀하단 이유로 모두가 환장하는 것을 우매하다 여겼고 금과 은에 애착을 갖지 않을 방법을 고안했다. 그리하여 주로 요강과 변기 제작에 사용되며 범죄자들은 수치의 표시로 금귀고리, 금반지, 금목걸이, 금관을 착용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범죄를 도모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된다. 똥 묻은 변기라도 뜯어서 튈 판이다.
그리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현세의 슬로건을 공개적으로 부수는데 노동의 가치를 셈하여 서열을 매기는 이유는 금과 은이 하찮아진 배경과 같다.
그 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인지가 기준이다.
그리하여 학자는 찬양받고, 도살업자는 천대받으며, 변호사라는 직업은 있지도 않다.
도살하는 행위는 파괴를 수반하여 인간 본성을 갉아먹기 때문이고, 말싸움이나 하는 변호사에 의지할 바엔 직접 판사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이 합리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과연 우리가 하는 일이, 내가 하려는 일이 인류의 삶에 필수적인가.
하지만 자유의 시대에 감히 누가 규격화된 인류의 삶을 제시할 수 있을까. 무엇이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이고, 불필요한지 선별하는 일 자체가 자기 결정권에 대한 모독이고 인간 존엄에 대한 위협이다.
나라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오롯이 내가 결정하여 살아간다.
나의 들끓는 욕망, 야망, 허영심을 채워주는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비난하는 자, 감히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최악의 죄악을 범했단 오명을 피할 수 없을 지어니.
그리하여 토머스 모어의 입지는 2018년의 세계에선 전보다는 좀 더 위태롭다.
2018년, 한쪽에선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외치면서도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사는 게 다 그런 거지.'라고 읊조리며 자조적인 인생관에 셀프 감명받고, 퍽 멋지다고 생각하며 술 한잔 기울이기도 한다.
역시나 현재에 굴복하고 납득하도록 교육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편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기본소득(basic income)을 검색해보면 마치 그 정확한 개념이 책에 떡하니 등장하는 것처럼 어디서든 유토피아가 언급되지만 내가 읽은 열린 책들 출판사의 번역본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기본소득은 국가가 모두에게 권리로서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는 돈이다.
영어 원문을 읽어보니 토머스 모어가 기본소득 정책의 최초 고안자가 아닌 단순한 기원으로 명명되는 이유를 알겠다. 현자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존 모턴 추기경과 나눈 도둑의 교수형 처벌에 관한 대화에서 '이게 기본소득의 기원인가?' 싶은 구절이 스치듯 지나간다.
Instead of inflicting these horrible punishments, it would be far more to the point to provide everyone with some means of livelihood, so that nobody’s under the frightful necessity of becoming, first a thief, and then a corpse
이런 무시무시한 형벌을 가하는 대신 모두에게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편이 훨씬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도둑이 되고, 종국에는 시체로 거듭나는 끔찍한 필연의 굴레에 그 누구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번역은 직접 했다.)
기본소득보다는 오히려 성매매 종사자들의 사회 복귀를 위해 지원금을 제공하는 인천시의 조례가 떠오른다. 정책에 대한 개인 의견은 묻어두겠으나, 토머스 모어가 21세기의 사람이라면 이 정책을 환영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16세기의 신실한 그리스도교인인 그는 성매매 종사자를 악의 축으로 여겼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물론, 21세기의 나는 성을 매수한 경험이 있는 사람을 발톱의 떼 정도로 여긴다.
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을 떠올린다. 꼭 대학을 가지 않아도, 화이트 칼라가 되지 않아도 기술자, 육체노동자가 모두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세금을 더 많이 내도 상관없으니 사회복지가 더 견고해지길 바란다는.
그는 성매매 종사자나 난민에는 우호적이지 않다. 이 글을 읽을 그 사람이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의 성향을 남긴다.
세금 한 푼 안내는 백수는 입을 꾹 다문다.
무분별한 자유는 혼란의 무법지대로.
책임지지 않고 권리만 챙기려는 도둑놈 심보는 모두의 공멸로.
그러면 강력한 통제로 사회질서를 바로 잡으면 되는 거 아닐까 싶지만,
강력한 통제자는 정의에서 곧잘 이탈한다.
인간다운 삶을 앗아가고 정의의 목소리를 내는 자를 고문한다.
포토저널리스트는 여전히 갇혀있다.
유발 하라리의 새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 표현의 자유로 서문을 열기에, 표현의 자유를 빼앗긴 포토저널리스트를 떠올리며 이곳에 그 내용을 옮긴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한 건 안 비밀^^ 493페이지 언제나 다 읽을는지.)
자유주의 모델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갖고 있는 결점을 고치거나 극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부터가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바라는대로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상대적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쓰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주기 바란다. 당신이 이 책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표현의 자유 또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책 속의 이상 국가, 유토피아는 퍽 갑갑하다. '만인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자기 일을 하든지 아니면 건전한 방법으로 여가를 즐길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쟁여둔 촛불을 챙겨 거리로 나선다.
예컨대, 사생활을 보장하라!! 라든지,
'일상적인 자기일'이라는 둥, '건전한 방법'이라는 둥 해석의 범위가 사람마다 달라지는 모호한 개념으로 자유를 통제하지 말라! 고 외치며.
하지만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역시 완전무결의 시스템은 아니다. 그 옛날 16세기의 부정의를 묘사한 아래의 글이 퍽 와 닿는 걸 보면.
국가로부터 최상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최소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위배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착취에 법의 색깔을 입혀놓음으로써 정의를 한층 더 왜곡하고 타락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의를 법적인 것으로 위장하여 놓습니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의 설명을 마무리하는 토머스 모어 선생의 글로 이 긴 글을 끝내려 한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유토피아에서 행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우리나라에서 모방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렇게 되리라고 정말로 기대하지는 않지만.
♪추천곡 Kazumi Tateishi Trio의 Jinseino merry-go-round 1:24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