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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Aug 26. 2020

내가 만든 타인을 만나는 일

난다, <거의 정반대의 행복>


나에게 어른이라는 것만큼이나 막연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일이 있다. 그건 단연 임신과 출산이다. 아이를 낳는 일을 떠올리면 뭔가 굉장하달까, 신비롭달까 하는 기분이 든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니, 맨정신에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SF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진짜 어른이 아니면 꿈꿀 수 없는 레벨이라는 직감.


임신과 출산을 이야기하려니 최근에 겪은 인상적인 경험이 떠오른다. 인테리어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눈여겨 봐왔던 미용실에 처음 갔을 때 일이다. 내 또래의 원장 혼자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기대했던대로 불필요한 경어체의 부담스러운 환대 같은 걸 안해서 좋았다. 남편과 동행했던터라 대화는 자연스레 결혼, 출산으로 드문드문 이어졌다. 원장이 먼저 "두 분은 아이가 있으세요?" 물었고, 나도 원장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이제 막 아이를 낳아서 4개월쯤 됐다는 대답. 그 말에 나는 "아내 분이 아직은 좀 힘드시겠네요." 했는데 원장은 그 간결하던 이전의 대답들과 달리 "저도 나와서 돈 벌잖아요." 한다. 약간의 억울함과 투정이 섞인 대답이다. 나는 "두 분을 비교해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아내분이 출산한지 얼마 안돼서 아직은 몸이 힘들겠다는 말이에요." 했다. 원장도 "그런 의미였군요. 워낙 잔소리를 많이 듣다보니 제가 좀 예민했네요. 죄송해요." 하며 머쓱해 하는 얼굴.


임신과 출산은 아내의 몸을 통해 실현되지만 단지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편 역시 함께 겪는 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대화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겪는 일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한 남편은 많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임신과 출산은 애정만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경험일터. 사람들은 그 간극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불필요한 무언가로 섣불리 채우는 걸까, 모른 척 넘어가는 걸까. 아니면 허들 넘기처럼 자꾸 닥쳐오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밀려 그만 자리를 내주는 걸까. 그러다가 서서히 잊혀지고 마는 걸까. 물론 이 모든 생각은 '다음부터는 이런 상황이 오면 주어를 꼭 "두 분 모두"라고 해야지.' 라는 다짐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휴, 원장의 섭섭해하는 얼굴이란.




작가는 언젠가 자신의 만화에서 '아이를 낳는 건 너무나 어른의 일' 이라서 자신이 그 어른의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망설이게 된다고 썼었는데, 그 고민과 망설임 끝에 한 아이의 엄마가 돼 가는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현상도 마찬가지겠지만 임신과 출산 역시 많은 부분은 오해받고 있고, 그녀라고 그런 오해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을 거다. 비욘세가 만삭의 몸으로 무대에 올라 금빛 드레스를 휘날리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징그럽다며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다는 세상이니까. 그녀는 그런 오해들마저 공평하게 다루면서도, 우리 삶이 결코 오해만으로 가득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의 미칠듯한 고달픔도,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 아이와의 일상도 모두 진짜라고. 그렇게 '거의 정반대의 행복'을 배워가고 있다고. 너무나 평범해서 특별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많이 즐겁고 조금은 짠하다.


이 책이 출판됐을 당시 내 친구 하나도 막 아이를 낳은 후였는데, 친구는 나는 아이를 낳지 않고 본인만 아이를 낳아서 우리 사이가 멀어질까봐 걱정했었다. "내가 자꾸 아이 이야기만 해서 너가 날 질려하면 어떡하지?" "지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멍청이가 되면 어떡하지?" 친구의 한숨 섞인 걱정을 들으면서도 "걱정마, 그런 일 없어." 말고는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했다. 임신이 여성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수유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갓 태어난 아기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는지, 자기만 하면 좋을텐데 왜 그토록 자주 우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모성이라는 말로 한 인간에게 강요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생명이 고귀하달 땐 언제고 아이가 조금만 보채도 눈치부터 주는 세상이 그 작은 인간과 그 인간을 돌보는 또 한 명의 인간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깨달아야 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말도 안 통하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보내는 일이, 한 사람의 자유로운 영혼을 얼마나 괴롭게 만드는지도. (아, 물론 그녀와 내 친구 모두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동시에 '이 말을 아무도 안 믿는다' 고도) 게다가 우리 모두는 저런 과정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모체 없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것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 역시 결국에는 생명의 고귀함이나 모성의 위대함 같은 말에나 기댔을지 모른다. 그 말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저런 말은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끝도 없는 돌봄의 시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 모성, 고귀, 위대 같은 거창한 말들로 희생과 노력을 강요하곤 한다. 아무리 고귀하다, 위대하다 칭찬한들 극도의 수면 부족과 호르몬 변화와 건강 문제를 책임져줄 수는 없다.




인간에게 어떤 변화는 너무도 갑작스럽고, 그런데 자연스럽고, 동시에 엄청난 것이라서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조차 없다는 것. 동시에 그 모든 변화를 받아들였어도, 그 변화 이전의 자신을 마치 타인처럼 그리워한다는 것. 그러니 임신과 출산을 겪(고 있는)은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당위나 책임을 한 데 버무린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그저 나' 일 뿐이라는 작은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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