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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02. 2021

영혼의 다락방

윤경희, <분더카머>


나는 마음 영혼 사랑 같은 단어를 들으면 속절 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부류의 사람이다. 그렇게 흐늘거리는 마음으로 어찌 살거냐며 내 친구들은 걱정을 하지만 걱정 마시라. 나는 생각보다는 강하고, 보기보다는 야무진 데가 있다! (과연?)


누군가를 떠올릴 때도 나는 그의 마음이나 영혼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말이나 행동말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이면의 어떤 것들. 그가

반복적으로 쓰는 단어,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 습관적으로 싫어하는 것과 이유 없이 좋아하는 것. 그런 것들을 알아가다보면 내 안에 그의 마음이나 영혼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과 색이 생긴다. 중요한 건 그 다음부터인데, 그 윤곽과 색은 어디까지나 흐릿할 것. 너무 두껍고 확실한 선으로 윤곽을 그리거나 어떤 색도 들어차지 못할 정도로 짙은 색으로 채우지 말 것.


쉽지 않다. 우리는 많은 순간, 누군가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는 안다고 믿는 조각들로 확신을 가지길 원하니까. 그런 욕심이 앞서면  굵고 확실한 선을 긋고  빽빽하게 색을 채우고 만다. 그러면   앞에 변화의 여지가 없는 인물 하나가 선다. 내가 그은 선인데도 그어진 선은  지워지지 않고 어떤 색을 덧칠해도 색이 바뀌지 않는다. 그때야 알게 된다.  그의 영혼을, 마음을 놓쳤구나.  그를 사랑하는데 실패했구나. 그렇다. "사랑은 예술에 속한다."






책을 읽는 일도 그렇다. 이 책은 이렇다 저렇다,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쁘다, 이건 훌륭하지만 저건 부족하다, 그런 말들로 분명한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색을 채워버리고 나면 책은 꽉 막힌, 답답한, 재미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 그러면서도 여전히 책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면, 그게 바로 내 발등 찍기인 셈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럴 수 없는 책도 있다. 내 생각을 멈춰버리는 책, 나의 판단이나 분류를 거부하는 책, 그러면서 내 영혼에 다가오려는 책, 마음의 문을 확 열어버리는 책. 좋아하게 됐다 뭐 그런 뜻이 아니다. 그냥 그 책을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너 뭐야? 누구야? 궁금해' 그런 마음. 자꾸 알고 싶고 자꾸 가까워지고 싶다. 내가 먼저 윤곽선을 그리지도 색을 고르지도 않는다. 그저 듣고 보고 만지고 느낀다. 그랬구나, 아하 그거였어! 나의 판단과 분류를 자꾸 미루게 하는 그 책은 알고보니 저자 자신의 영혼의 다락방을 소개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영혼의 다락방을 소개 받았으니, 나의 판단과 분류는 내려놓는 게 매너고 예의다. 그는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혔는데 내 욕심만 채우려는 건 친구가 아니라 사기꾼이니까.


윤경희 작가가 열어놓은 다락방에 올라가서 나는 한참을 놀았다. 조각조각 나뉘어진 언어들 사이로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던 그녀의 영혼들은, 조금씩 하나하나 내 주변으로 모여들고, 하나의 형체를 스스로 드러낸다. 나는 그것을 베껴 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본다. 너의 영혼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걸 깜빡한다. 너와 가까워져서 좋다고 말하는 걸 또 깜빡한다. 그저 그녀의 다락방에서 웃고 울고 또 궁금해하는 것이다.


쑥스러워하는 너를, 좋아하는 걸 알려주고 싶어하는 너를, 말에 기대어 살면서도 말을 겁내고 무서워했던 너를, 아파하는 너를, 울던 너를, 그러다가 또 조금 웃는 너를 나는 알게 되었다. 어쩌나, 다 알게 되었고 나는 너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만다. "사랑하는 것이여, 세상에서 오직 나만 알아보는 귀한 보물이다, 너는. 나는 너의 말을 배울 것이다. 나는 너의 획을 알아보고 너의 의미를 해독할 것이다. 심지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들 어떤가. 그저 깨진 돌인들 어떤가. 너는 있다."






나는 그녀의 책을 읽었지만 그 안에 담긴 그녀를 알게 되었지만, 내 안에서 그녀의 윤곽은 찾아볼 수 없이 흐릿하다. 그녀의 영혼과 한참을 놀았지만 나는 그녀를 판단하지도 분류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놀았고, 즐거웠다. 웃었고 울었을 뿐.


그런데 내 마음이, 내 영혼이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 말할 수 없는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려고 해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해봐, 너의 아픔을 겪어봐 살아봐, 금지된 언어를 말해봐. 무슨 소리지? 아, 그녀의 영혼이 들려준 소리들이다. 나를 살게 하려고, 함께 살아가려고, 좋아하는 것을 나눠주려고 그녀는 나에게 속삭인다. "자기를 있지 못하게 하는 그런 말들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그리하여 그런 말들만큼이나 모든 말들을 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러면 더더욱 내가 있을 수가 없으니, 숨이 멎을 듯 아프니, 그런 말들이 아닌 다른 말들을 해야 비로소 살겠구나.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나는."


나는 드디어, 말한다. "고마워"



덧. '경이로운 방'이라는 뜻의 '분더카머'는 대체로 근대 초기 유럽의 지배층과 학자들이 온갖 진귀한 사물을 수집해 진열한 실내 공간을 일컫는 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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