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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Sep 09. 2021

꼭 시냇물 흐르는 소리 같은,

박연준, <쓰는 기분>


글은 글을 쓴 그 사람을 닮는다. 누군가는 글이 자신보다 더 괜찮아 보이는 것을 경계했고, 누군가는 글을 통해 자신이 좀 더 나아가길 바랐지만, 그들은 아마 동시에 글이 자기 자신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차가운 겨울의 눈 같은 시를 쓰고 누군가는 봄볕 아래 누운 고양이 같은 시를 쓰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역시, 글 안에는 글을 쓴 사람이 (어떻게든) 담긴다.


이런 말을 잘도 쓰지만 실은 나 역시 글을 쓰고 있으므로 그렇다면 과연 글 안에 담긴 나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글이 나를 전부 다 담을 수는 없고 글에 담긴 내가 완전히 투명할수도 없으니 오차 범위를 인정한다 치고. 내가 아무리 객관적이려고 해도 나에게는 '내'가 맹점이자 사각지대이니 내가 원하는, 상상하는 그 모습이 내 글 안에 담겨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글을 다듬고 또 다듬으며 나 역시 나아갈밖에.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기 시작한지 약 15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이해받고 싶은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이해받게 되었다'고 했다. 15년. 난 숫자에 약해서 15년이라는 게 감각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차라리 다행일까. 그래도 꽤 길다는 느낌인데. 나는 저 문장을 들은 후로 다행이다는 생각과 굉장하군이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글을 통해 내 안의 것을 표현하고 그것이 다시 나 아닌 타인에게 읽히고 해석되려면 15년은 아주 짧은 시간일수도 아주 긴 시간일수도 있는 거니까.


이런. 또 수다다.









박연준의 <쓰는 기분>을 읽었다. 여러 번 고백했듯이 나는 시인이 쓴 산문에 매혹된다. 그것도 번번히, 자주 그런다. 좋은 걸 좋다고 하고 싫은 걸 싫다고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기질상 밀당을 잘하는 까다롭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는 일은 요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인들의 산문 앞에 선 나는 쉬워도 너무 쉬운 사람. 홀딱 반하고 이야기에 빠져드는 사람. 그리고 나서는 동네방네에 이것 좀 같이 읽어보자고 광고를 하는 사람. (너무 쉬운데?)


그녀의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산 속 깊은 곳에 흐르는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그러니까 말 그대로 "돌돌 도르르르르 돌돌" 하는 소리가 들리는 시냇물 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내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 당장 두꺼운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발을 담그고 싶어진다. 정신차려! 눈을 떠보면 나는 내 집 책상 위.


그녀의 글은 또한 웃음소리 같다. 깔깔깔도 아니고 하하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껄껄이나 허허도 아닌 경쾌하고 가벼운, 하지만 경박하지 않은 웃음소리다. 그녀의 글이 시와 시 쓰기에 대해 제법 진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실례가 안 된다면, 그녀의 글은 사랑스럽다.


그녀의 글이 사랑스러운데 내가 굳이 '실례가 안 된다면' 이라고 덧붙인 이유는 사랑스럽다는 말에 대해 부연하고 싶어서다. 미남, 미녀 배우들을 떠올린다. 배우들은 대개 아름답지만 그러니까 굳이 '미남' '미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경우에 그들의 배우로서의 자질은 그 '외모'로 국한된다. 차라리 '개성있는'이라는 수식어는 많은 경우에 '연기력이 출중한'으로 번역되니, 내가 배우라면 좀 억울할 일이다. 그것도 연기에 애를 쓰고 노력하는 이라면 더욱. 사랑스럽다는 건 마치 미남미녀라는 수식어처럼 그저 타고나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실 모든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매력'이다.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을 읽는 동안 당신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문을 거는 것. 자연스러움을 유지한 채 긴장하는 것. 이게 어렵다. 온몸으로 인지하면서, 동시에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


예술은 가르칠 수 없고 그저 함께 쓰는 것이라는 얘기나 좋은 시는 반드시 그 안에 음악을 품고 있다는 얘기, 감히 등단을 바라지 말고 시를 쓰라고, 그저 순전하게 시가 좋아서, 시를 쓰지 않으면 안돼서 시를 쓰라는 얘기를 가만히 읽다 보면 역시나, 그녀에게 사랑스러움은 거저 얻어지는 유전적인 요인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이게 나야'라면서 상대에게 자신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글은 물러섬이 없다. 양보하지 않는다. "좋은 시는 항상 누군가를 상처 입게 한다"거나, "몸처럼 영혼도 자주 씻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녀는 단호하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질 않는다. 거침없이 뾰족한 말을 해맑게 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깊이다. 투명함이다. 그 깊이를 명랑하게 말한다. 고됨도 애씀도 어느새 흘려보내고 투명한 깊이만을. 그러니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그것이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므로 나는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글쎄. 나는 자주 그렇다. 노력하고 애쓴 것들, 눈물 자리가 선연한데 그러면서도 다시 웃기로 마음 먹은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꼭 아플 필요야 없지만, 만약 아픔이 있었다면 그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반대로 자기 공 없이 그저 얻어진 대로, 그게 어떤 의미이고 책임인지 고민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사랑할 수 있나? 더 정확하게는 사랑할 필요가 있나? 존재 자체로 이미 많은 행운을 가진 것들에게 굳이 내 애정까지 줄 필요야 있을까. 살아갈수록 이런 마음의 방향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나는 시 쓸 때 독해진다.

내 안에 '얄짤없음'이 진동한다.

내 안에 슬픔이 피처럼 고인다.

슬픔으로 살인이 가능해,

핏물 흥건한 고깃덩이처럼 내가 상한다.

미안하게도.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생각했다. 만약 예술 마저도 그 중에서도 문학 마저도 다시 또 그 중에서도 시 마저도 투명하지 않다면. (다른 것들은 그래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시를 사랑해서 시를 쓰는 게 아니라 그저 필요해서, 수단으로 시를 쓴다면. 예술 역시 천편일률적으로 '가르칠 수 있'고, 심지어 그 기준대로 평가가 가능하다면. 나는 그런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나 상상이 되어서 거부한다. 그런 세상은 싫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끼니를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예술가를. 오직 써야 하기 때문에 그려야 하기 때문에 지어야 하기 때문에 뭔가를 만들어내는 그들을. 돈이 아니어도 그들이 그것들을 해낼 수 있는 사회를. 그들이 만들어낸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사회를. 그러지 않고는 그 무거운 짐을 오로지 그들의 어깨 위에 얹고 나는 그저 너무나 쉽게 그들의 그 사랑스러움을 받아 읽고, 덕분에 내가 나아지고, 낫고, 웃게 되는 것이 못내 마음 쓰인다. 동시에 시에서 너무 먼 삶을 살아야 하는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어깨 위에 올려진 짐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녀가 상상하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시를 읽고, 시를 쓰고, 결국 시와 가까운 삶을 사는 세상은 분명 저 사람들이 만들어야 할 것이고. 나는 그런 상상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켜본다. 꿈꾼다.


아, 시인의 산문이란. 나 아무래도 '영업'당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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