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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n 03. 2021

매일의 변주를 견디는 일

송은혜, <음악의 언어>


어릴 때 나는 왈가닥이었다. 여자아이들과 노는 것보다는 오빠와 오빠 친구들을 따라 산이며 들이며를 헤매고 다니는 게 더 신났다. 그래서 자주 넘어지고 다쳐오곤 했다. 그러던 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했었다. 산만한 내가 어떤 힘에 이끌려 한 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던 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퍽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다. 즐거웠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삼촌은 결혼을 했는데, 그 결혼식에서 피아노 반주를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날 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례 선생님의 '큐' 사인에 맞춰 '결혼 행진곡'을 연주했다.  


여기에도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사실 그때 나는 영어를 몰라서 주례 선생님의 '큐' 사인을 알아 듣지 못했었다. 선생님은 내가 귀엽다는 듯 "제가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네요"라면서 "연주자님, 결혼 행진곡을 좀 연주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물으셨고, 나는 그제서야 피아노를 쳤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며 웃었는데, 내가 마치 '진작에 그럴 것이지'라는 표정으로 연주를 했다나. (나는 긴장했을 뿐이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폭죽 소리, 환호 소리에 내 피아노 반주가 점점 빨라지던 감각. 나중에는 나 역시도 신이 나 버려서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알려준 박자도 다 잊어버리고 내 손이 가는대로 흥에 겨워 연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피아노 연습을 힘껏 하고 학원 밖으로 나오면 내가 좀 더 '큰 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재잘재잘 장난을 치다가도 피아노 앞에서 음표 안에 담긴 신호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고 어느새 거기에 몰두해서 뚱땅거리고 나면 어린 마음에도 내가 좀 멋있게 느껴졌달까. 고작 30-40분 피아노를 뚱땅거렸을 뿐인데 나는 내가 마치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걸음 걸이도 말투도 어딘가 좀 어른스럽게 하려고 노력했었다. 물론 얼마 안 가 다시 아이들과 고무줄 놀이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지만.


"자아는 내면의 불협화음과 리듬을 감추는 하나의 구조물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끊임없이 타협하며 산다.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자발적인 수동성과 색다른 시간의 경험으로 이끈다."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송은혜의 <음악의 언어>를 읽으며 어린 시절에 잠깐 피아노를 배웠던 경험을 떠올렸다. 음악은 우리와 늘 함께이지만 그래서 막상 음악이 어떤 건지, 음악이란 뭔지 생각해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나를 위로해주는 음악, 나를 북돋워주는 음악, 내 추억 속의 음악 처럼 음악은 삶의 곳곳에 묻어 있지만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음악은 어디까지나 삶의 '배경'이 될 뿐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음악은 삶의 배경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고, 인간이 만들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또한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훈련하고 또 훈련하는 삶,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삶을 통해 저자는 음악과 삶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찾아낸다. 음악과 삶이 꼭 닮은 지점들을 발견해내고, 음악과 삶이 서로를 위로하는 지점들을 들려준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생겼고, 다른 성격을 가졌으며, 다른 삶을 산다.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에 충분히 집중한다면 작곡가의 생각은 나의 색채를 입은 소리로 되살아난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한 가지는 자기 확신이다. 타인의 소리를 듣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남의 소리를 따라가기만 해서는 자기 몫을 제대로 해내기 힘들다. 자신의 역할과 존재 이유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연주자는 다른 연주자에게 폐가 될 뿐 아니라 곡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디아벨리 변주곡을 들으며 위안을 얻는다. 빈약하고 어설픈 주제라도 포기하지 말자. 매일의 삶이 만드는 변주는 견디다 보면 언젠가 독특하고 풍성한 변주곡의 마지막 장을 감사히 덮을 날이 올테니."


우리는 때로 음악이나 미술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막상 그들 자신은 어떻게 느낄까 궁금했는데, 저자는 자신도 그런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고 담담히 말한다. 세상이 불공평하고 슬프고 애달픈데 음악이라는 성에 갇혀서 매일 돌아오는 평가와 연습, 그로 인한 경쟁에만 매몰되는 건 아닌가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마침내 음악이 세상을 품어 안고 연주될 때, 그럴 때만 음악은 사람들의 그 모든 불공평 슬픔 애달픔을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었던 거라고, 세상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며 함께 눈물 흘리며 쌓아온 시간으로 연주하는 거라고.


"그 순간 내가 속해 있고, 알고 있는 세계의 한 축이 무너졌다. 세상과 유리된 채 경쟁의 성에 갇혀버린 음악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인간의 가치를 일깨우는 음악의 의미를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을 끌어안는 음악의 추상성. 말도 그림도 우리의 마음을 담아낼 수 없다고 느낄 때, 한 소절의 선율로 모두를 위로하는 음악의 힘."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옷을 만들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람을 설득하거나. 우리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다양한 삶을 살아가지만 나는 때때로 그 모든 삶을 관통하는 비슷한 원리들이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그러니까 저 모든 일들에 대해 '본질적으로' 가까워질 때, 그 모든 일들이 가진 외연이 아니라 그 일들의 내면으로 파고들 때, 내가 쓰는 글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까지, 내가 만드는 음식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까지, 내가 물건을 파는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지점까지 다가갈때만 알 수 있는 어떤 것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분명 무형의 것이고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서 그것을 경험해본 이들은 한결같이 '그것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디테일들을, 어떤 상황들을 연거푸 살아내고 살아내고 또 살아내면서, 우리는 끝내 어떤 본질에 다가서려 애쓰는 건 아닌지. "직관도 지속적인 연습이 받쳐줄 때 가능하다"거나, "음악은 어울리는 음과 어울리지 않는 음으로 이루어진다. 아니, 이 문장은 틀렸다. 그 어떤 음도 서로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는 마음도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래서 840번의 연주는 매번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840번의 반복은 840번의 새로운 창조가 된다. 그 시간을 경험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해탈의 경지" 같은 말을 들을 때 느껴지는 것.


그러니까 그건 내가 나를 밀어올려서, 끝까지 해보았는가, 끝의 끝까지 가보았는가, 하는 질문이다.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유일하게 나만이 아는 대답.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녀의 길의 끝의 끝으로, 어쩌면 시작의 시작으로, 아니 영원으로 향해 가는 중인 것이다. 또한 나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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