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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May 06. 2021

내가 발 딛고 선 세계에 대하여

마거릿 애트우드, <글쓰기에 대하여>


내가 살면서 지키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대부분이 똥고집에 가깝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똥고집스러운 건) 직접 경험해서 얻어야 하는 노하우나 기술들에 대해서는 웬만해서는 책으로 간접 지식을 얻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 글쓰기의 경우, 차라리 작가나 편집자가 쓴 직업에 관한 에세이나 출판 산업 자체에 대해 정리한 실용서는 읽어도 글을 어떻게 써라, 몇 단락 짜리 글이 보기에 좋다, 실패하지 않는 글쓰기의 열 가지 원칙 같은 부제를 단 책들은 되도록 읽지 않으려고 한다.


우선, 그 책들이 쓸모 없거나 무의미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책일수록 잘 읽히며 내 기억에 쏙쏙 각인되곤 한다. 그 분류들도 심히 공감이 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일도 많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겪지도 않았는데, 이미 나는 그 일에 대해 너무 많이 알게 된 것 같은 불균형한 감각이 불편하다. 그 책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더구나 모든 일에는 단지 몇 가지로 분류하거나 정리할 수 없는 (때로는 더 중요하기도 한)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런 것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경험하면서 얻어내야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래 간접 지식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것들도 막상 직접 부딪혀서 경험하면 같은 내용이 전혀 다른 감각으로 와닿는 경우도 많다. 같은 지점에 서 있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는 길이 다른 그런 느낌. 나만의 방식으로 어딘가에 가 닿아야만 비로소 그 경험과 내가 맞아떨어지며 균형이 맞게 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고는 저 원칙을 좀 더 신뢰하게 되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글쓰기에 대하여> 역시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뾰족한 대답도 내놓지 못하는 책이다. 작가는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글 쓰는 법에 대한 책도, 나의 저술 활동에 대한 책도 아니다"라고 분명히 못 박아 두고 굳이 말하자면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글"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실로 그러하다. 그녀는 작가란 과연 어디에 발 디디고 어디에 앉아서 무엇을 바라보며 누구에게 책을 쓰는가,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물어야 하는 질문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주 지성적인 언어로, 또한 위트와 품격을 담아서 말이다.


작가란 누구인지, 우리는 언제 어떻게 작가가 되는 건지, 작가의 사회적 위치와 책임은 무엇이며 어느 정도인지, 작가의 예술성과 인간성은 어떤 관련성을 가지며 현실에서 둘은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긴장과 둘 사이의 관계성은 어떠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쓰기와 죽음이 맞닿는 지점, 다시 말해 작가 스스로가 파고드는 심연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수많은 작가들의 말과 글을 들려주며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진솔한 의견을 나눠준다.


각 장의 주제와 그녀의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문장들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의문이 들었습니다. 문을 통과해 시인들이 우글거리는 개미총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반드시 무언가를 보증받는 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짜 보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일까? 어떻게 해야 그만한 수준이 됐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 그나저나 수준이란 건 뭘까? 이들 중 일부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면(그건 분명했지요)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말인데, '훌륭하다'는 건 뭘까? 누가 훌륭한지 여부를 결정했으며, 어떤 리트머스 시험지를 사용한 걸까?" (1장, 길 찾기 -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중)


"순수한 야망을 품고 진짜 작가, 진짜 예술가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 작가에게 이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 전반적으로 유도라 웰티의 소설 <화석인>의 대사처럼 "그렇게 똑똑하다면서 왜 부자가 아니에요?"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분위기라면 더욱 그렇지요. 그러면 가난하면서 진실한 예술가, 또는 부유하면서 영혼을 팔아넘긴 예술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하거든요. 이렇게 신화가 굳어져가는 거지요. (3장, 헌신 - 위대한 펜의 신 중)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까요? 어떻게 밀고 나가야 할까요? 예술적 진실과 사회적 책임을 모두 중시하는 작가에게 주체성이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종류의 주체성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물으면 이렇게 답할지도 모릅니다. '증인'이 되라고. 가능하다면,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가 되라고. (4장, 유혹 - 푸로스퍼로, 오즈의 마법사, 메피스토와 그 무리들 중)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네(Timor mortis conturbat me)"라는 라틴어 구절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걱정(덧없음, 무상함, 결국 언젠간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글을 짓고자 하는 욕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도 많습니다. 그런데 차고 넘치는 사례들을 믿고 그 관련성을 인정한 뒤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왜 다른 예술이나 매체가 아닌 굳이 글쓰기가 개인의 최종적 소멸에 대한 불안과 그토록 밀접하게 연결되는 걸까요?" (6장, 하강 - 죽은 자와 협상하기 중)






얼마 전 모 작가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한 출판사와의 갈등이 어떻게 정리되었고, 자신의 입장은 무엇인지에 대한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리트윗한 또 다른 작가의 코멘트 중 인상 깊은 구절, "누구 말대로 작가들은 '선생님'소리 듣는 호구에 불과한 건지"라는 말이 오래 마음 속을 맴돌았다.


글쓰기와 책, 독서와 출판이라는 산업에 모종의 연심을 품고 있는 나는, 오랜 시간 작가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연심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갖고 있)다. 그건 그들이 고결하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너무 인간적이어서일지 모른다. 어찌 보면 구제불능인 사람들이어서일지도 모른다. 모두 잊어버린 어떤 일들을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람,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능력,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실제라 여기는 것들도 상상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 자신을 "흠모하는 늪지"가 된 독자들이라 해도 그들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써내는 사람, "자신이 무명으로 살다가 죽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반사적으로 연필을 낚아채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것에 서둘러 자신의 이름을 쓰게 되는" 사람들.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 모든 작가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담담한 응원을 보낸다. 당신들이 걷고 있는 그 길이 얼마나 깊은 어둠 속인지 안다고, 나는 어떤 환상도 없이 그 길을 말하겠노라고, 나 또한 겪어봤으며 여전히 빛을 향해 더듬 더듬 걸어가는 중이라고.


과연 그녀의 말대로 이 책을 통해 작가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해 살짝 들여다본 것만으로 나의 마음은 휘청댄다. 두렵다. 내가 사랑하는 그(것)들을 나는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가졌던 그 모든 환상이 사라진 뒤에도 말이다. 그때 보이는 건 그들의 맨몸이 아니라 나의 맨몸일 것이어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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