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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an 14. 2021

홍세화, <결: 거칢에 대하여>


마음은 연약한데 불행한 일은 많았던 나는 사는 게 힘들었다. 나를 둘러싼 불행과 내 마음의 괴로움은 별개의 문제였는데, 과거의 나에게는 그 둘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었다. 나는 점점 더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긁혔고, 그걸 추스를 틈도 없이 다시 현실의 문제들이 들이닥쳤다. 하나하나 해결하자고 마음먹기도 전에 더 큰 일들이 생겼고, 나중에는 뭐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막막해지고 말았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과 내 안의 괴로움이 뒤엉켜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처럼 불어났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이 흘렀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지만, 저 덩어리를 그대로 둔다면 점점 더 굳어버릴 게 뻔했다.


처음에는 단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는 나의 고민들이 시간을 덧입고, 경험을 쌓아가며 연약함 그 자체에 대한, 혹은 다른 이들의 연약함에 대한 고민으로도 번져갔다. 하지만 연약함을 보는 일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아픔을 보는 일은 힘들었다. 그래서 자꾸만, 안 아프려고 애를 쓰게 됐다. 답이 있다고 생각해서 절박하게 쫓았다. 뭐든 너무 절박할 때, 너무 간절할 때는 위험하다. 시야가 좁아진다.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몇 백 만원짜리 강의에 덜컥, 신청을 하려던 밤이었나. 강의를 준비한 사람의 글에 깊이 공감하며 읽었던 터라 하마터면 수 백 만원도 아깝지 않다며 지불할 뻔 했는데, 갑자기 반항하는 마음이 들었다. '글에서는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이 행복해지는 게 자신의 행복인 것처럼 굴더니, 실은 돈이 행복하게 해주는 거였니?' 저자에 대한 신뢰가 싸늘하게 식었다. (내 의심이 날 살린 건가) 그 글들이 내 연약함을 보듬는 말이 아니라, 내 연약함을 이용하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오기가 났다. (강의를 듣지 않았으니) 글과 강의의 진정성 여부를 논할 수는 없게 되었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그 모든 계획이 실패한 셈이었다. 그날로 누군가가 나의 연약함을 해결해주길 바라며 기대는 마음을 접었다. 마음이 연약해질 때마다 떠올릴 흑역사가 생긴 셈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고 나니, 마치 배수의 진을 친 것처럼 혼자가 되었다. 나에게는 나밖에 없다고 믿으니 어떻게든 살아졌다. 그런데 막상은 혼자도 아니었다. 나는 나에게 수 백 만원을 요구하지 않는 (기껏해야 만 삼 천원을 요구하는) 선량한 책들을 친구 삼았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연약한 마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누구는 소설을 썼고 누구는 시를 썼으며 어떤 이는 과학을 통해 그 마음을 보듬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단 돈 몇 백 만원만 내면 남은 생애 동안 마음이 절대 다치지 않게 해줄 자신이 있다고 날 현혹하지는 않았다. 세상은 '연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그 연약함을 무기삼지 않는 이들 덕분에 굴러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죽는 순간까지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없다. 소박한 자유인에게 긴장의 일상은 필수적이다. 불현듯 스스로 아름다워지거나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순간이 다가올 때 겸연쩍어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그 순간을 껴안고 삶의 변곡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바라보는 나 자신과의 소리 없는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외출할 때마다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매무새를 살피듯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메타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일상을 통해 조금 더 아름답고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본문 중)


사회비평에세이 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은 인간의 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책도 마찬가지다. 특히 메타 사유, 다시 말해 생각 위의 생각, 생각을 바라보는 생각에 대해 작가는 쉼 없이 강조한다. 반가운 마음에 더욱 공감하며 책을 읽었다. 내가 나의 연약함을 보듬을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메타 사유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다. 또한 나의 생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 생각이란 그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거나, 내 무의식이 잘못 도출해낸 부유물일 뿐 결코 내가 아니다. 당연히, 내 생각이 모두 옳을리도 없다. 그렇게 받아들이고나서부터 나의 연약함은 그 자체로 괜찮은 것이 되었다. 나는 연약하지만, 괴롭지는 않았고, 나는 연약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고, 나는 연약하지만, 나쁜 선택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내가 정말 연약한건지, 편견에 불과한건지도 고민하게 되었고, 나아가 연약함이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도 돌이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연약한 것이 과연 불편하기만 한 일일까?  








작가의 말처럼, 메타 사유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다. 특히 '나 자신'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해, 나의 생각에 대해, 묻는 것이다. "내 생각은 언제부터 내 생각이 되었지?" 어렵지 않은 질문이지만 막상 시도해보면 말처럼 간단한 질문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기 자신을 오랜 시간 동일시 해왔다면 나를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마치 '자기 분열'의 과정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막상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자신의 생각들이라는 게, 그다지 멋있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으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작가 역시 이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스스로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며 자신도 여전히, 고결한 인간이 되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다고 되뇌인다. 인간은 마지막까지 완성되지 않는 존재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가장 정확한 말이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못난 생각들에 실망할 모두를 위한 위로다. 지금 자신의 못난 생각을 알아챘나? 괜찮다, 인간은 완성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이제 다시 시작. (이런 부연 설명을 꼭 달아야 하나 싶지만, 이 위로에 지나친 자기애나 반대로 지나친 자기 학대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려는 노력만이 유의미하다.)


"나를 짓는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은 고결함을 지향한다. (중략) 어제 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나를 짓기 위함이다. 그는 '회의하는 자아'다. 회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짓는 자유는 무의미하다. 고쳐 짓거나 새로 지을 게 없는, 이미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인이 '회의하는 자아'로서 지향하는 고결함은 제로섬게임이 적용되는 고귀함과 다르다. 고귀함은 '귀함'이 뜻하듯 태생적으로 선택된 사람이거나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다. 고귀함은 그 반대편에 비천함을 필요로 하지만, 고결함은 그렇지 않다. 나의 고결함이 너의 비루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고결함은 남과 경쟁하여 승리한 자의 몫이 아니라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의 산물이며 선물이다. 나의 고결함이 너의 고결함을 가로막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고결함으로 이끈다." (본문 중)


그는 나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사회 곳곳을 메타 사유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거기에는 따가운 지적도 있고 세심한 배려도 있지만 무엇보다 '당연함'에 대한 전복이 있다. 새로이 바라보지 않는 것, 고민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일관되다. 그는 말한다. 스스로를 '완성된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그런 사람들의 총체인 사회 역시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굳어질 것이며, 그런 사회는 언제든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억압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이미 충분히, 그렇게 돼가고 있다고. 그러니 함께, 용기를 가지자고 말이다.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지금 당신이 하는 그 생각 한 자락의 변화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의 전부일지 모른다고.


평범한 나는 나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지는 못하겠다. 세상의 변화? 내 생각 하나 고쳐먹기도 버겁다. 다만, 내 생각이, 나와 세상을 분리시키고, 나를 변명하는데만 부지런하며, 하찮은 이유들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데 일조하고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고쳐야 한다. 그것만이라도.








용케 사기를 피한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강의를 통해 내가 바랐던 건, '상처 받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었고, 그렇다면 그들이 나를 속인 게 아니라 내 욕심이 너무 컸던 거였음을. 애초에 그런 마음은, 없거나, 만약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의 마음이 아니다. 상처 받는 게 두려웠던 나는 '나의 생각'을 고수하며 점점 딱딱해지고, 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면 나를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생각에서 놓여나는 것, 내가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나'라는 허구로부터도 벗어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임을, 끝내는 그 지킨다는 인식조차 사라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매일 배운다. (물론 완성은 없다) 나는 연약하지 않으려 발버둥쳐왔지만, 이제는 생각한다. 삶의 어떤 국면에서는 '충분히 연약하기로.' 영원히 상처 받지 않는 마음을 가진 비인간으로 사느니, 영원히 상처 받는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살기로.


그렇다.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다. 또한 나의 생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세상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나는 조금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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