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안에는 여전히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주류와 비주류를 가르고, 나이와 서열로 사람을 가르는 문화가 만연하다. '나는 아니'라고 느낀다면, 조용히 혼자 만족하는 게 좋을거다. 내가 느끼기에 이 사회에는 가해자는 없다는데 피해자는 넘쳐나니까. 나는 나름 선량하고 단지 '운'이 좋아서 불편하지 않게 살아왔다고 떠벌리다가는 당신이 그 익명의 '가해자'를 대표하게 될 확률이 크다. 이건 정말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의 책을 몇 권쯤 읽었다. 고개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끄덕거리면서, 같이 울면서, 같이 분노하면서 읽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은 모두 '다르게' 산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글을 마주하면 사람이 전부 '비슷하게'사는 것 같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는 왜 비슷하게 고달픈 걸까. 그의 글에는 삶을 거부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맞닥뜨린 사람 특유의 솔직함이 있다. "나에게 닥친 우연에 저항하지 말고 운명을 회피하지 말고 삶의 요청을 수용하기로 했다."는 고백이 절절하게 와닿는건 스스로를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는 진솔함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후줄근하고 별볼일 없는 삶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그 후줄근하고 별볼일 없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을 버티고 있는지를 고백하는 이의 글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자기 고백을 넘어선 성찰이 된다. 개인의 깊은 내면은 어딘가에서 모두와 만난다. 그 순간이 되면, 어떤 것도 더이상 개인적이지 않다. "불행에 삶의 자리를 선뜻 내어주자 나는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슬프게 읽는다. 공감한다. 삶에는 불행이 너무나 많고, 그 불행을 거부하는 한 우리는 반쪽짜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불행중에서도 운명이나 하늘이 준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든 줄여가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것은 불행이지만, 어쩔 수 있는 것은 죄다. 사람이 사람에게 죄짓지 않아야 다수가 함께 겪는 불행이 줄어든다.
"나는 인간의 역사와 윤리를 성찰하는 철학자도 아니고, 성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계층적 불평등이 심화된 이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꿈꾸는 급진적 혁명가도 아니다. 다만 글쓰기가 경계를 넘어서고, 구멍을 만들고, 틈을 벌리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라는 이근화의 말처럼(이근화,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마음산책, 2020), 나도 나를 '규정된 무엇'으로 부르지 않는다. 다만 나누고 구분짓고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 말고 삶에는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있음을 잊지 않고 싶다. 그걸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그러한 이상이 실현되는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내가 발 딛고 있는 내 삶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렇게, 사람이 사람에게 짓는 죄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노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