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그러나 나는 슬픈 사람이기보다 슬픔을 알아보는 사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슬픔이 너무 많이 보이는 사람. 당신이 죽을까봐 겁났던 사람. 목도한 슬픔에 대해 증언하는 모든 예술과 때때로 나는 동지 같다. 그들은 사물이고 나는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시간이고 나는 사람일지라도."
바다 위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수평선과 맞닿은, 그러니까 넓다거나 깊다는 말로는 부족한 바다 위로 투둑 투둑 비가 떨어지는 모습을 오래 지켜본 날이 있어요.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했어요. 비가 오면 우산도 써야 하고, 비를 오래 맞으면 감기도 걸릴 수 있고, 비 오는 날은 빨래도 안 마르고,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너무 적게 오면 인간은 휘청대면서 이런 저런 문제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뿐인가요? 비가 오면 슬퍼진다고, 서글퍼진다고, 아니면 비가 와서 좋다고, 빗소리가 좋다고. 우리는 그저 내리는 비일 뿐인데도, 의미를 부여하고 좋아했다 싫어했다 그러거든요. 비라는 게 인간에게는 이렇게나 퍽 중요한 일이죠.
바다 위로 떨어지는 비는 글쎄요, 흔적도 없이, 그러니까 비가 내렸다는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뭐지? 바다에 비가 떨어지면,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내리는 비가 귀여워서 그만 웃어버렸어요. 열심히 내려서 바다에 풍덩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비가 편안해보여서 웃었어요. 비는 그저 내렸고, 바다는 그저 꿀꺽 꿀꺽 비를 삼켜주었어요. 그리고 그 모습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어요. 꼭 그 비가 사라지듯, 제 안의 뭔가가, 바다 속으로 흡수돼서 사라져버린 것처럼요. 아무렇지 않게 비를 받아 마시는 바다를 보는 일이요. 아주 좋았어요.
바다 위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것을 보고 저는 다시 한 번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녀의 글은 꼭 그 장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다 위로 하염 없이 비가 떨어지던 그 장면이요. 세상의 모든 슬픔들이 그녀에게로 가면, 자취를 감춰요. 아니, 바다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 모든 슬픔을 꿀꺽 꿀꺽 삼켜서, 이 아름다운 책을 한 권 썼다고 해야 할까요. 바다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놓고 그녀는 괜찮다고 하잖아요. 더 들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비가 좀 더 내려도 아무렇지 않다는 바다처럼요.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나는 슬픈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서
슬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아주 오래 살다 나올 수 있어요
슬픈 사람의 그림자를
몰래 쓰다듬어주다가
잠드는 것을 보고
돌아올게요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이 세상이 슬프다는 걸 우린 알아요
슬픈 세상 속에서
슬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바닥에 글씨를 쓸 수 있어요
슬픈 사람의 눈물 자국을
몰래 닦아주다가
눈 뜨는 것을 보고
돌아올게요
그녀는 공연예술이론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래요. 공연하면 저도 할 얘기가 있어요. 어렸을 때, 처음 '뮤지컬'이라는 걸 봤던 기억이 있어요. 세종문화회관에서 '미녀와 야수'를 보았어요. 우리를 공연에 데려가고 간식을 먹이고 다시 또 집까지 바래다준 어른은 물었어요. "공연을 보고 어땠어? 무엇을 느꼈어?" 그때 저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똑똑히 기억해요.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거든요. 다른 아이들의 대답과는 너무 달라서, 저는 좀 부끄러워졌었거든요. 그래서 더 오래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서 저는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어요. 무대 위를 걷고 뛰고 날아다니는,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저는 제 심장이 실제로 뛰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제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 나올 것처럼 뛰어서 놀랐어요.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라, 즐거워서, 신이 나서, 흥에 겨워서, 저는 살아 있었어요. 그렇게도 사람은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그녀가 들려주는 무대 위의 이야기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많은 공연 이야기들이 하나도 낯설지 않았어요. 공연이란 건 순간에만, 찰나에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죠. 저도 그건 알아요. 그래서 그 공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과거형의 공연이고, 기억 속의 공연일 뿐이죠. 그런데 그게 마치 우리 삶에 대한 은유 같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어요. "우리가 살아갈 때, 눈앞에 세계가 지나간다. 그 가없는 흐름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잇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현재라는 찰나 속에 우리는 산다. 일몰의 시간, 사라지는 빛이 물들이는 하늘을 보며 옆에 선 이에게 아름답지, 말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은 이미 지나가고 없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가 우리에게 허락한 생의 방식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극을 한 편 보고 나올 때처럼요. 그것을 보는 동안 저는 살아 있고, 그것을 본 덕분에 더욱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었지만, 그래서 대체 내가 본 그것은 뭐였을까, 까마득해지는 감각처럼요.
또 있어요. "끔찍한 고통은 몸에 각인되므로, 쫓으려 해도 영원히 돌연한 소스라침으로 우리를 깨우는 반면,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은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끝내 잊히고 만다. 나는 삶으로부터 그것을 배웠고 그리하여 되도록 많은 것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요. 그녀가 들려주는 그 공연들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앓고 있어요. 아프게 아프게, 괴롭게 괴롭게 앓아요. 울부짖어요. 아주 작은 이 책을 읽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프게 아프게, 괴롭게 괴롭게 읽어서일 거예요. 혹은 제가 아직 덜 아프고, 덜 괴롭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의 책을 읽으며 저는 조금 더 아파졌고 괴로워졌다는 것.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그 모든 것은 나의 무지 바깥에서 늘 존재해왔으므로. 살아갈수록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더욱 깊어지는 것만큼 다행한 일이 또 있을까. 나는 아픈 쪽이 훨씬 좋았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네, 저 역시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고통을, 슬픔을. 그리고 제가 굳이 그것들을 쓰고 싶어하는 그 까닭에 대해 저는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모를 때보다도 더 모르겠어요. 알려고 하니 더 모르겠어요. 그래서 늘 초보인 채로, 수련생인 채로, 처음인 채로, 아직입니다. 책을 열면 또 처음 보는 고통이, 살다 보면 또 처음 보는 슬픔이 나타나요. 그렇게 읽다 보면, 살다 보면 문득 깨닫죠. 어쩌면 아는 고통 같다고, 아는 슬픔 같다고. 그런 순간에 그것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돌아서요. 마치 알아봐주길 기다렸다는 듯이요. "모든 것을 알아도 문장을 말하는 이유는 그 말의 발설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어서일까요, "모든 것을 알아도 생을 사는 이유는 살아야지만 삶이 존재하기 때문"일까요. 그러니 저는 다시 초보로, 수련생으로,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 보는 고통과 슬픔이 나타날테죠. 그렇게 반복됩니다. 다 알아도 씁니다. 다 알아도 말하고, 다 알아도 삽니다.
부끄럽지만, 이제는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제가 슬픈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면 저는 절대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가 하는 일이 꼭 글쓰기여야 할 이유는 없을테죠. 그래서 저는 제가 왜 또 다시 글을 쓰고 있을까, 오래 생각하고 있어요. 어쩌면 저는, 제 삶에 일어났던, 혹은 우리가 함께 겪었던 그 슬픔이 제 삶의 결론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서 기어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말하자면, 슬픔이 시작이 되게 하고 싶은 거예요. 슬픔에서 출발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거예요. 슬픔이 결론인 이야기가 아니라, 슬픔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말예요. 슬픈 것들에서 건져올린 수많은 것들과 손잡고 우는 이야기, 그것들을 달래주고 보듬어주는 이야기요. 그리고 그것들을 내 삶의 마디마디에 보물처럼 숨겨둔 숨바꼭질을요. 그런 것들을 글을 통해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래서 가끔은 얼마나 막막한지, 아시나요? 슬픔은 언제나 저보다 더 크고 넓어서, 세상에는 슬픔이 너무 많아서, 저는 아직도, 여전히, 슬픔 속에서 건져올리고 있어요. 매번 처음 만나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다시, 다시. 그게 대체 뭔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것들을 다 건져 올려야 제대로 된 뭔가를 쓰게 될 거라고 감히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어쩌면 그건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고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제 아둔함. 섣부름. 이럴 때는 그저 웃죠 뭐.
누군가 제게 물어온 적이 있어요.
"왜 슬픈 것들에서만 건져올리시나요?"
저는 대답했어요.
"꼭 슬픈 것들에서만 건져올리려는 건 아니예요. 다만, 슬픈 시간들에게 미안해서요. 너무 빨리 지워버리려고, 잊어버리려고, 때로는 없던 것처럼 하려고 하는 게 미안해서요. 슬픔에게도 공평하고 싶어요."
가끔 제 생각보다 빨리 쓰게 되는 저는 이렇게 좋은 질문을 만나 제 안에 있지만 제가 글로 다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해요. 그럴 때 저는 제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먼저 쓰고 그렇게 쓴 이유를 나중에야 정확히 알게 되는 거예요. 저 질문 덕분에도 알게 됐죠. 아, 나는 슬픔에게 미안하구나. 슬퍼하고도 외면받아야 하는 처지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이렇게 십시일반으로 도움을 받아가며, 저분은 왜 슬픔에 대해 물으셨을까 궁금해하며, 그래서 그 뒤에 날아온 대답을 여러 번 읽으며, 그렇게 쓰고 말하고 살아요.
언젠가의 저는 이런 글귀를 쓴 적이 있어요. '나는 슬픈 것에 예민한 아이였다.' 그런 문장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그녀가 그 뒷 문장을 알려주었어요. "그러나 나는 슬픈 사람이기보다 슬픔을 알아보는 사람"이었다고. 그녀가 "장 끌로드 아저씨에게 오페라를 빚졌"던 것처럼, 저는 그녀에게 제 슬픔의 한 조각을 빚졌습니다. 슬픔을 알아보는 마음 한 자락을 빚졌습니다. 학자금 대출이나 신용카드 고지서를 받을 때는 느껴보지 못한 이토록 애틋하고 뭉클한 차용증을, 전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