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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22. 2024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인스타를 흘러 다니다가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어떤 챕터 하나를 정리해 둔 내용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대에 운영하던 가게를 접고 전업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을 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 대한 요약이었다. 요약한 이가 말하기를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업 소설가로 충분히 자리를 잡은 다음에 가게를 접었고, 가게를 접고 아내와 함께 가장 중점적으로 변화를 꾀한 것은 생활의 리듬을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 일찍 잠드는 것으로 바꾸는 일이었다고. 나 역시 단순하고 작은 생활을 영위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터라 그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고, 그렇게 하루키의 책을 구매하여 직접 읽기에 이르렀는데. 알고 보니 그 요약에는 요약한 사람의 ‘오독(?)’이 담겨 있었다. 


전업할 당시에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가게에서의 수입이 더 컸고, 그래서 전업 소설가가 되겠다는 그의 의견을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어쩐지 가게 운영과 소설 쓰는 일 둘 다를 병행하며 어찌어찌해내는 상황이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느꼈고, 어느 쪽이든 전력을 다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게 더 마음 편하다고 생각해서 여전히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설가로 전직을 한 것이었다. 내가 오독한 부분도 있었는데, 나는 하루키가 이렇게 작은 생활을 유지하며 작가로서 좀 더 탄탄한 기반을 잡는데 대략 7년 여의 시간이 걸렸다, 고 그 게시물에서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7년 여의 가게 운영을 접고 소설가로 전직했고, 그 이후 작가로서 입지를 다져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기간을 정해두고 쓰지 않았다. 게시물을 다시 찾을 수는 없으니, 그의 오독이었는지 나의 오독이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나의 오독이리라 생각한다(이유는 아래에).


나는 이 오독의 과정을 따라가며 (물론 그러려고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은 얼마나 제멋대로 읽고 해석하는가! 심지어 내가 읽은 게시물의 작성자는 (어쩐지 신뢰가 가는) 짧고 단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내용을 전하고 있었고, 때로는 하루키의 문장 중 일부를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어떤 부분에서는 끝내 오독을 하고만 것이다. 나는 어떤가. 본 내용을 요약/정리해 둔 것을 보고도 오독을 했다. 하루키가 단순한 생활로 돌아서고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 7년이 걸렸다는 오독을 통해 이제 막 새로운 삶에 뛰어든 나를 격려 하고 싶었나!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지만) 그렇다면 이 책을 요약해서 올렸던 누군가도 어쩌면 하루키가 ‘이미 성공한‘ 상태에서 전업 작가로의 길로 뛰어든 것이라는 오독을 통해 자신의 어떤 부분을 위로하고 싶었나! 그는 지금 전업을 고민하는 회사원+소설가일 수도 있겠고, 이미 전업을 선언한 후일 수도 있겠다. 때로 우리가 저지르는 오독은 독자적인 우연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무의식이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만들어낸 작은 환상일 수도 있겠다. 책을 잘못 읽어낸 지점이 실은 가장 정확히 나를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뇌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구나. 토닥토닥.


사연이 길었다. 이 책을 읽으며 이미 작가가 글을 ‘당연히’ 잘 쓴다는 인식이 워낙 확고해서 실제로 얼마나 좋은 사유와 글인지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잘 쓴 글이 어딨나) 이것도 일종의 편견이 아닐까 싶었고. 어디까지 읽어내려고 하느냐가 독서의 질을 결정하기도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새삼 생각했다. 작가 특유의 자기 객관적인 태도(때로는 좀 너무 야박하다 싶을 만큼)도 좋았고 간간이 끼어드는 유머도 좋았다. 무엇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뭔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오롯이 책임을 다하는 삶의 방식이 가장 좋았다. 


+


“그리고 그런 근육의 특성은 그대로 내 정신적인 특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생각은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특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반대로 정신의 특성이 육체의 형성에도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정신과 육체는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며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는 천성적으로 ‘종합적 경향’ 같은 것이 있어서, 본인이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정도이다. 경향은 어느 정도까지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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