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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Jun 26. 2022

임윤찬

파아노,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음악의 이데아

단팥빵을 먹을 때, 나는 반을 뚝 잘라 속의 팥이 충실한가, 얼마나 달콤한가 여부를 먼저 가늠한다. 그리고 만약 단팥의 양이 부실하거나 맛이 없으면.. 별루인거다. 뚝 자른 반만 대충 먹거나 말거나.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것도 그러하다. 2악장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미로운가에 따라 그 곡, 그 연주를 듣고 말고가 결정된다. 그런 면에서 라흐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하 피협) 2번은 단연 걸작 중의 걸작이다. 예술적인 면에서나 대중적인 면에서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은 그 어떤 곡도 따라 올 수 없다. 나 또한 라흐마노노프 피협 2번을 무던히 좋아했다. 음반만 대략 20장쯤 되는거 같다. 피협 3번은 그에 비하면 대중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예술성 만큼은 2번 못지 않다. 그의 피협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3번은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백건우의 연주를 가장 좋아했다. 그의 연주는 매우 느리다. 느리면서도 음과 음 사이에 수직으로 착공하는 사색이 있고 삶을 관조하는 담담한 시선이 있다. 아쉬케나지, 호로비츠,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자신이 녹음한 음반을 들어보아도 백건우에 미치지 못한다.(물론 나의 취향에서 말이다) 러시아 거장들의 연주는 생각보다 빠르고 가볍다. "아니 뭐야, 이런 곡을 그냥 이렇게 툭툭 쳐? 좀 성의있게, 생각하면서 치라구~"


하지만 나의 이런 오랜 편견과 편애는 최근에 깨졌다. 임윤찬이라는 18살 짜리 피아니스트에 의해서. 그의 연주는 충격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는 콩쿠르가 아니라 임윤찬의 콘서트였다. 콩쿠르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보였어야 할 지휘자 마린 앨솝은 그러나 연주 중간 중간에 그 자신이 받은 감동을 숨기지 않았다. 곡이 끝나고는 눈가를 훔치는 듯도 싶었다. 윤찬의 또다른 결승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2악장의 인트로에서도 그녀의 표정은 뭐라고 형언하기가 힘들었다.


윤찬의 연주는 내가 오랫동안 잊었던 것, 혹은 부인했던 것, 순수함, 본질 같은... 나는 그런 개념들이 일종의 허깨비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너무도 복잡하고 허망하며, 겨우 겨우 정신줄 잡고 사는 것, 주어진 현상에 집중할 것, 이렇게 생각했던 나에게 윤찬의 연주는 현상 너머의 어떤 아득한 본질, 진리 그 자체, 아름다움 그 자체를 보여 주었다. 본질(體)은 그 본질을 현현케하는 현상(用)을 타고 드러나며, 그래서 현상은 본질을 예화한다. 결국 본질과 현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형이상학을 말하는 오래된 중국철학자들의 방식이다. 책에서 읽을 때 이런 말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지만 윤찬의 연주는 이 오래된 형이상학을 내 눈 앞에서 시연했다. 그의 타건은 명료했으며 스케일은 유려했고 화음은 손에 잡힐 듯 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음악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순수의 추상, 수학의 세계와도 같은... 


윤찬의 라흐마니노프에는 삶의 달관도, 창백한 달빛도, 더더군다나 철학이나 사색 따위는 없었다. 그런 것들을 훨씬 뛰어 넘는, 아름다움의 이데아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압도하며 지상에 강림하는 듯했다. 희노애락과 무관하게 눈물이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왜, 그.. 그냥 눈물이 툭, 흐르던...


그의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의 해석에 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그게 맞다.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연주해야 했다. 열정과 창백함, 따스함과 차가움, 어둠과 밝음...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음악이 이성理性과 역사를 직시하고 그로부터 승리한, 혹은 패배한 인간의 내면이라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광활한 혼돈, 비이성적인 아름다움, 진흙과 설탕이 뒤범벅된 그 무엇, 책상을 내리치는 듯한 저음부의 타건과, 달빛 일렁이는 술잔 너머의 우울한 세계... 그런 것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이다. 이성과 역사가 아닌, 혼돈과 달빛의 아름다움, 윤찬의 연주는 그 본질을 보여주었다.


이 18살 청년이 더 성장하여, 부디 더 깊어질 것이 없이 깊어지는 연주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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