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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조 Jan 28. 2023

짝사랑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탈 때마다 곁눈질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앉아있는 사람, 기대있는 사람, 노약자석, 약 냉방칸, 스크린도어가 열리면 쏟아져 나오는 지친 영혼들. 나는 이들을 훑고, 넘기고, 때로는 집요하게 머무르며 몇 안되는 단서로 주제넘게도 그들의 인생사를 어렴풋이 그린다.


코앞에 진한 보라색의 네모난 안경을 쓰고 독수리 타자법을 사용하는 중년의 여성이 있다. 나는 ‘예쁜 우리 보물’이라는 사용자명을 보고 그의 딸과 문자를 나누고 있으리라 추측한다. 시선을 돌리면 차가운 봉의 주위로 둥글거리는 어린애가 있다. 아이는 뽀글거리고 콩알 같은 외양으로 방글댄다. 기분 좋은 시끄럼.

어떤 노인은 백발이 성성하고 그 몸은 씨앗처럼 쪼그라들었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홍색 옷만 입었다. 키플링 가방을 맨 수녀님의 손목에는 길고 붉은 흉터가 있다. 상상계가 고개를 내민다. 낚시 조끼의 그물망 주머니에 홍삼 사탕을 가득 담은 할아버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탐독하는 청년, 연시(戀詩)를 속살거리는 카멜색 코트의 연인들.

  



시선을 주지 않는 이들에게 마음을 쏟는 일은 일종의 짧은 짝사랑이어서 한 명 한 명이 열차에서 내릴 때마다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나는 당신들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 너머를 상상했다. 아주 어쩌면 어느 정도는 당신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익숙한 얼굴들보다 처음 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쉽다.


사랑했다면 흔적을 남겨야 한다. 나는 26분간의 사람구경 중 뇌리에 남았던 몇을 (음침하게도) 메모장에 해설해 뒀다. 홍대입구역에서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나오자마자 이 글을 쏟아 냈다. 미약하게나마 애달픈 짝사랑을 덕지덕지 토해낸다. 글 솜씨가 좀 더 좋았더라면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한 벌 지어드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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