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4
뛰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궁무진하다. 달리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수면시간이 부족해서, 저녁을 늦게 또는 많이 먹어서, 날씨가 너무 더워서, 무릎 상태가 어딘가 평소와 다른 것 같아서,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해서···. 창의력이 부족해 고민이라면 당장 밖으로 나가 달려봐도 좋을 것이다. 그간 스스로를 과소평가해 왔음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스멀스멀 ‘오늘은 적당히 뛰다 말아야 할’ 핑계들이 고개를 든다. 주행거리 2km를 지나면서부턴 발목을 잡아채는 내면의 목소리의 데시벨이 상승한다. 이는 내가 주로 달리는 안산 자락길의 구성이 2km 정도 지점으로부터 이후 3km 가량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지는 통곡의 코스인 까닭일 것이다.
호흡이 가빠 오고 허벅지가 터질 듯 부푸는 것만 같고, 중력이 나에게만 핀 포인트로 두 세배로 작용하는듯해 세상을 탓하게 될 때쯤, 멈추어야 할 당위를 찾는 잔머리의 속도도 극에 달한다. 그러다 보면 ‘은호’가 주체인 핑계가 떠오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은호가 새벽에 일찍 깨서, 은호랑 산책하는 데 힘을 다 써서, 은호가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어서 등등.
그러면 부끄러우면서도 되레 힘이 난다. 아니, 힘을 내게 된다. 내 아무리 못난 놈이로서니 지 좋자고 하는 달리기를 그만 둘 구실을 자식에게서 찾을 쏘냐, 은호는 신생아 때부터 나 때문에 세 차례나 대학병원 신세를 지는 고초를 겪고도 일순도 나를 책망하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리한단 말인가, 하며 바닥을 있는힘껏 박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목표한 양의 달리기를 완수하면 괜히 은호와의 약속을 지킨 양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은호는 영문도 모른 채 꿈나라를 여행 중일 테지만.
어릴 적 엄마는 “승재는 너무 핑계가 많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정말로 그랬다.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아야 할 이유, 책상정리를 다음 주로 미루어야 할 이유, 태권도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 당장 심부름을 이행할 수 없는 이유. 온갖 상황에서 갖가지 핑계로 하기 싫은 일들을 피해 왔다. 비단 유년의 일만은 아니다. 학창시절에도 대학생 때도, 사회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여전히 난 힘듦으로부터 도피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달리기에서만큼은, ‘아직까지는’이란 전제를 붙여야겠지만, 고질병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부모가 그토록 일러주고 싶었던 걸 내가 부모가 되어서야 아주 조금씩 익혀가고 있는 셈이니, 이 무슨 인생의 아이러니람. 궁금한 건, 내 부모는 핑계와는 담을 쌓아도 단단히 쌓은 양반들인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것. 어쩌면 그들도 누나와 내가 태어난 이후로 변한 것일까? 알 길 없는 노릇이다.
은호는 나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역시나 ‘아직까지는’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아무튼. 은호는 끊임없이, 망설임 없이 무언가를 시도한다. 걷기를, 달리기를, 손을 뻗기를, 맛보기를, 소리 내기를. 그래서 은호의 몸은 상처투성이다. 늘 실패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넘어지고, 이리 쿵 저리 쿵 여기저기 부딪힌다. 그리고 그 일을 반복한다. 이러쿵저러쿵 변명 없이,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상처 입는 것 따위 익숙하다는 듯이.
난 운동화 끈을 조여야지. 숨이 차고 땀이 나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건 진짜로 당연하니까, 내가 정한 만큼의 거리를 내 창의성의 한계를 시험하며 묵묵히 달려나가야지. 이까짓 아픔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을 수 있을 때까지.
하루키가 훗날 러너로서의 자신의 묘비명에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 쓰고 싶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이 문장을 새겨야겠다. ‘적어도 은호 탓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