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씨의 금붕어입니다.
세상의 모든 금붕어들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워싱턴, 디씨에 사는 금붕어입니다. 뻐꿈뻐꿈. 워싱턴에 있는 한 씽크탱크 인턴으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새내기 금붕어예요.
눈은 멀뚱히 뜬 채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뻐꿈뻐꿈 움직여보지만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어도 영어도 영 시원찮아요. 아, 어쩌면 말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진 건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금붕어답게 기억력도 좋지 않죠.
금붕어로 세상에 나오기 전 여러분의 삶은 어떠했나요? 눈빛은 빛났던가요?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싶은 대로 뱉어냈던가요? 그럭저럭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을 테죠?
글쎄요. 금붕어가 되기 전의 나는 어땠는지, 이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요.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내 예상치보다 수준 미달인 것은 확실합니다. 서울에서의 나는 디씨에서의 내가 미디어 속 멋있는 사회인일 줄 알았어요. 조직에 필요한 일을 척척 해내고 또 제안하며, 영어도 잘하고, 동료들과는 한국과 미국 사회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그런 여성 말이죠.
나는 아이디어를 내고 동료들과 이야기하며 그것을 확장시키는 과정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개인 과제보다는 팀플을 훨씬 좋아했죠. 팀플을 하며 얻은 소중한 친구도 여럿이고요. 그러나 인턴의 일터는 아이디어 개진이나 토론보다, 상사의 업무 지시로 채워지더군요. 이곳은 정해진 원칙을 잘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곳입니다. 슈퍼바이저의 업무 지시도 가끔 못 알아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완벽하게 못 해내서 답답해요. 으앙.
훗. 인턴들이 하는 일이야 뻔하지 뭐.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못해낼 게 뭐가 있겠어? 하고 생각했답니다. 요즘은 그 중요하지도 않고 사소하고 흔해빠진 일도 못하는 나를 발견하는 놀라운 날들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내 속의 치기어린 마음도 발견하죠. 내 옆엔 이곳이 첫 인턴십인 나와 달리, 이곳이 여덟 번째 인턴십인 베테랑 인턴이 앉아 있습니다. 나는 금붕어지만, 유유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그는 잉어 쯤 됩니다. 가끔 내가 어떤 일을 잘 해내고, 베테랑 인턴이 뭔가를 놓친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은근한 뿌듯함이 마음 속을 가득 채우죠. 뿌듯하게 내가 조금 알려줘야겠다 싶어 그에게 말을 걸면, 이내 그는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
회사에서 쓰는 언어는 왜 그렇게 어렵고 정치적일까요? 회사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다 내뱉어선 안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힘들다고 해서 진짜 힘들다고 찡찡댈 수 없죠. 슈퍼바이저에게 공동 작업물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땐 반박하고 싶은 오기가 내 안을 채웁니다. 내가 잘한 것은 티나지 않고, 내가 못한 것은 꼭 티가 납니다. 내가 아니라 그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 '그'가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없어 답답합니다. '그' 또한 지난 날, 나의 실수들을 보며 답답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팀으로서 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를 듣고 열을 해낼 수 있을까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멀뚱멀뚱. 뻐꿈뻐꿈. 그래도 나는 살아남고 있습니다.
사소한 것도 까먹던 3초 기억력은 조금씩 늘어나더군요. 4초, 5초, 하루, 그리고 며칠. 뻐꿈뻐꿈하던 내 말도 조금씩 언어의 형상을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내 영어를 가지고 슈퍼바이저는 짓궂은 농담을 던지지만, 나는 이제 적당히 받아칠 수 있습니다. 훗. 또 조금씩 옆자리 잉어 인턴처럼 내 시야를 바깥으로 늘려가고 있습니다. 원래 하던 일은 조금 능숙해졌고, 나에겐 원래 주어지지 않던 리서치 업무도 처음으로 해보게 됐답니다. 내 리서치 업무에 대해 상사가 outstanding하다고 답장한 메일을 따로 보관해 둔 것은 비밀입니다. 히히히.
멀뚱멀뚱.
뻐꿈뻐꿈.
고민은 남아있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남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모든 금붕어 여러분,
더 나아질 우리의 내일을 믿으며 같이 힘냅시다.
Sincerely yours,
디씨 금붕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