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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예슬 May 05. 2019

어떤 여행에서 얻은 것

3박 4일 동안의 제주

내가 한 여행들은 언제나 나에게 피로를 남겼다. 여행지를 마냥 걷다 육체적 피로를 얻기도 했고, 여행지의 아름다움을 소화하려 두뇌를 풀로 가동하다 정신적 피로를 얻기도 했다. 피로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의 나는 늘 기진맥진했다. 얼른 집에 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난 주에 다녀온 제주도 여행은 달랐다. 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 출구를 나서는데, 전혀 피로하지 않은 것이었다. 도리어 산뜻한 기분을 느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도 내 안에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며 이런 기분은 느껴 본 적이 없어 나도 내가 신기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기는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 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나 또한 얻고자 했던 것은 반쯤만 얻고, 예상치 못했던 것을 얻어온 여행을 했다.

판포리 산책길

이번 제주 여행에서 내가 얻고자 한 것은 단 두 가지, 철저한 쉼과 무한한 영감이었다. 그래서 숙소도 관광지와는 거리가 있는, 서쪽의 조용한 시골 마을 판포리에서 구했다. 일몰 시간 이후엔 가로등 불빛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번화하지 않은 곳이었다. 더 많이 구경하고 더 많은 사진을 찍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잘 자고, 잘 먹고, 깊이 생각하고 싶었다.

흐려서 더 좋았다.

참 잘 쉬었다. 판포리의 내 방은 고요했다.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강변북로를 접하고 있는 서울의 내 방에서 매일같이 소음에 시달리다 맞이한, 꿀같은 시간이었다. 너무 잘 잤다. 매일 밤 여덟 시간씩은 꼭 잔 것 같다. 또, 어딜 갔다 왔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가만히 있었다. 판포리 동네(에 있는 바다 주변)를 걷고, 서점에 가서 책을 읽고, 북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노래를 들으며 걷고,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오랜만에 제주도민 친구들도 만났다.


영감은 못 얻었다. 제주도의 돌담, 즐비한 선인장과 그 끝에 피어난 백년초, 끝간 데를 모르고 펼쳐진 바다, 여유로운 사람들…. 이런 제주의 환경에 처하면 재밌는 이야기를 쓸 온갖 영감이 피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영감을 얻어야지 하고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면 오히려 생각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었다. 점점 더 멍해졌다. 눈 앞의 풍경에 눈과 생각과 마음을 모두 빼앗겨서 그 외의 새로운 생각이나 영감 따위는 낄 새가 없었다.


예상치 못하게 얻은 것도 있었다. 하나는 생활 습관. 나는 스스로 충분히 납득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이다. 예컨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좋다는 말도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나는 그저 하나의 교조적 명제로 여겼다. 어떤 이에게만 좋은 것을 과도하게 일반화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제대로' '자발적으로' 행해본 적도 없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조식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는 밤 11시에 공용 공간을 소등하고 욕실 사용도 자제시켰다. 자연스럽게 나는 11시 이전에 씻어야 했고, 같이 묵던 게스트들과 수다를 떨다가도 11시에는 내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워 일기도 쓰고, 그 날 찍은 풍경 사진도 보고, 책도 읽다 보면 자정이 지나기 전에 시나브로 잠기가 왔다. 푹 자고 일어나면 알람 없이도 8시에 깼고, 9시에 조식을 먹었다. (이 시간이 과연 ‘일찍’인지는 차치하자.)


그렇게 사흘을 지내 보니 너무 좋은 것이다. 완전히 납득됐다. 푹 자서 컨디션도 좋고, 아침에 일과를 시작하니 하루도 길게 느껴지고, 긴 수면시간을 확보하려니 하루 일과의 집중도도 높아지고, 잠들기 한 시간 전에는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시작하니 잠의 질도 높아졌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비슷한 생활패턴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고,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이소호 시인의 '캣콜링' 득템의 순간

예상치 못하게 얻은 또 다른 하나는 이소호 시인이다. 알차게 큐레이팅된 고산리의 작은 서점에서, 이전엔 존재도 몰랐던 이소호 시인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의 시집 ‘캣콜링’에서 고작 몇 개의 시를 훑었을 뿐인데 나는 순식간에 매료됐다. 시를 어렵게 생각했고, 오래된 것이라 생각해 왔다. 젊은 황인찬 시인의 시집을 선물받은 적이 있었지만, 재미를 붙이진 못했다. 이소호 시인의 시는 대단히 현대적이고, 충격적이고, 충격적일 정도로 좋다. 요즘 밤마다 그녀의 시를 한두 개씩 읽고 자는 재미가 있다.


얻고자 했던 것은 반쯤 얻고, 예상치 못했던 것도 조금 얻은, 어떤, 피로하지 않았던 여행. 처음으로 해 본 피로하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일상을 다시 살아갈 힘을 준 여행이었다. 이런 여행이 있어야만 살 힘을 얻는다는 것이 조금 슬프고 웃기지만, 앞으로 피로한 여행과 피로하지 않은 여행을 적당히 버무려가며 써 나갈 나의 새 여행기들이 기대된다. 이렇게 기대할 에너지도 이번 여행에서 얻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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