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예슬 Jul 08. 2021

혼자 사는 겁쟁이의 변명

그래서 나는 우습게도 한 번 더 건네볼 법한 안부 인사를 참는다.

휴일 날 나 하나로 가득 차는 원룸 오피스텔에 누워 있자면 이 세상엔 나만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외부의 개입은 전혀 없다. 일 안하는 날이니 회사에서 오는 연락도 없고, 요 사이 부쩍 바빠진 엄마의 연락도 없다. 일어나는 시간도 내 마음대로, 뭘 (시켜) 먹을지도 내 마음대로, 넷플릭스에서 뭘 볼지도 다 내 마음대로다. 배달앱으로 시킨 음식을 먹으며, 넷플릭스에서 고른 영화를 보던 중, 너무 졸려서 다시 잠에 드는 것도. 또 다시 일어나 멈춰뒀던 넷플릭스 영화를 마저 보는 것도 다 내 의지에 달려 있다. 


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건 정말 다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내 멋대로 착각을 하기로 한다. 내가 지내는 이 작고 네모난 방 바깥의 세상은 멈춰 있다고. 


별로 바쁘지도 않은 주제에 쌓여 있는 카톡에 제대로 답장하지 않는다. 내 답장을 기다리는 상대의 시간은 흐르지 않을 테니까. 내가 언제고 답장하면 상대는 얼음-땡! 하는 상태가 되어 고작 몇 초 전까지도 나와 카톡을 주고 받았던 사람처럼 대화를 이어가줄 테니까. 맞지?


그럴 리가.


할머니 생신이었다. 우리는 맛있는 것들로 할머니의 생일을 즐거이 축하했고 (취업에 성공한 나는 현금 선물도 척 하고 안겨 드렸다!), 할머니는 생일 케이크에 꽂힌 수많은 촛불을 불며 즐거이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앉아 당신들이 세상을 떠난 뒤 벌어질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이 닥치면 정신이 없을 테니 미리 정해 두는 게 너희에게 편할 것이다. 의대에 기증한 시신은 해부를 마치고 6개월 뒤 돌아올 것이다. 선산이나 납골당 중 편한 곳에 묻어라. 선산에 묻으려면 종친회 간사에게 연락하면 된다. 내가 선호하는 방식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희의 몫이니 너희가 편한 방식대로 하여라.


... 


분명 아직 정정하시다고 생각했는데. (정신 건강이 정정하신 것일까.) 다시 본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엔 내가 평소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얼굴에서보다 많은 주름이 있었다. 엄마는 그제야 두 분이 최근 몇 차례에 걸쳐 자녀들에게 현금을 나눠 주셨다는 얘기를 했다. 할아버지는 요새 부쩍 기운이 달린다고 하신다.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다. 시간이 흘러 무럭 무럭 자랐으면 좋겠다. 아는 것이 많아졌으면 좋겠고, 아직 겪어보지 못한 수많은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가 답장 없는 내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할머니는 언제까지고 예슬이는 15개월만에 기저귀를 떼어서 기저귀 값이 하나도 안 들었다는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혼자 이 작고 고요한 방에 살다 보니, 자꾸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견고해진다.


그래서 나는 우습게도 한 번 더 건네볼 법한 안부 인사를 참는다.

묻지 않으면 현실도 끝내 모를 수 있다는 듯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