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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16. 2016

일곱 번째 잔, 샤커레토

격변의 맛

흔들리고 부딪혀 부드러워졌다. 날이 선 듯 날카로웠던 에스프레소의 맛이 파도에 다듬어진 조약돌처럼 매끈하다. 예민하고 까칠하던 쓴맛이 곱게 갈린 모래처럼 거품이 되어 떠올라 진한 흑맥주처럼 보였다. 어두운 색에 겁을 먹고 찡그렸던 이마는 혀에 닿는 부드러운 거품과 달큼한 커피와 만나 펴진다.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에스프레소를 식혀 마시는 것은 어지간히 쓴맛에 단련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상당히 고역스러운 일이다. 일단 향이 사라지고 잘 섞여 있어 부드럽게 만들어 주던 지방이 분리되어 신경질 적인 쓴맛만 난다. 그런 에스프레소를 시원하고도 맛있게 먹는 방법은 얼음과 함께 쉐이커에 넣고 사정없이 흔드는 것이다. 샤커레토라고 부른다. 어느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아이스 에스프레소로 사커레토를 판매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달콤한 시럽을 넣어 함께 흔들어 주는데 종종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흔드는 과정으로 에스프레소는 시원함과 부드러움을 얻고 바리스타는 손목 통증을 얻는다. 만약 바리스타가 혼자 있는 카페에 가서 여러 잔의 사커레토를 시킨다면 맨 먼저 받은 커피의 거품이 가라앉을 때쯤 마지막 잔을 받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꺼져버리는 거품은 여러 명의 수건 돌리기 같은 수다에 어울리지 않는다. 단둘이 앉아 칵테일을 음미하듯 나긋한 말과 함께 마시는 것이 좋다. 한 잔의 고백하기 어려웠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한 잔의 너그러운 마음은 이미 이해했다 말한다.


처음에 이 병실의 눈먼 사람들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을 때는 두세 마디만 나누면 낯선 사람도 불행을 같이 겪는 동반자로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서너 마디만 더 하면 서로 모든 허물을, 그 허물들 가운데 일부는 정말 심각한 것이었음에도, 용서해 줄 수가 있었다.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中


서점을 들를 생각으로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출발했다. 평일 오후 버스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가득 이었다. 어린 새처럼 조잘대는 이야기들이 버스를 가득 채웠고 간지럼을 태운 듯 배가 당길 만큼 웃는 모습들이 귀여웠다. 분명 저들은 귀엽다는 이 말을 좋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줍은 분홍빛 입술을 새빨간 틴트로 물들이고 전분가루를 바른 찹쌀떡처럼 뽀얀 솜털을 BB로 꼼꼼히 덮어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스럽게 보이기를 바라던 나이다. 


그 시절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대학생들이 모여 사는 시트콤처럼 매일 같이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친구들과 한 번 약속 잡기도 힘들다. 팽창하기 위한 강한 수축으로 모여있던 것처럼 졸업과 동시에 부지불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책을 보았던 시간들이 저 밑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의 밀도가 달라졌다. 낯선 시간을 입은 친근했던 사람들. 그 시절 우리는 단 한 번도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다.


1교시가 끝나면 뛰어가서 토스트를 사 먹었던 친구는 밀가루를 먹지 못하는 체질이 되어 있고,

방과 후에 미술실에 남아 아그립파를 그리던 친구는 사회 교사가 되었고,

여름 방학 동안 과학반 수업으로 함께 해부 실험을 했던 친구는 일어를 전공하고,

죽일 듯 노려보던 둘은 남녀가 되어 손에 같은 반지를 나누어 끼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각자의 흐름대로 흔들리고 부딪혀서 완성되었다. 조금 더 성숙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처음에는 그 모습이 조금은 낯설지만 곧 그 안에 함께 했던 맛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행히도 낯선 거품은 금세 가라앉았다. 철없고 산만하고 웃음을 참지 못했던 어린 마음들이 인사를 했다. 어제 만났었던 것처럼.


흔들리고 부딪혀 부드러워졌다. 날이 선 듯 날카로웠던 에스프레소의 맛이 파도에 다듬어진 조약돌처럼 매끈하다. 예민하고 까칠하던 쓴맛이 곱게 갈린 모래처럼 거품이 되어 떠올라 진한 흑맥주처럼 보인다. 어두운 색에 겁을 먹고 찡그렸던 이마는 혀에 닿는 부드러운 거품과 달큼한 커피와 만나 펴진다.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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