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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r 31. 2017

열다섯 번째 잔, 라임 소다

한 숨의 맛

입안이 와글와글 시끄럽다. 연신 쏟아지는 빗소리 같은 시끄러움이 싫지 않다. 아니, 개운하기까지 하다. 한마디에 서운함이 박혀있던 가슴은 소리로 씻어 내린다. 짜증이 쌓여 울분이 된 마음이 눈으로 올라오기 전에 입에서 사라진다. 한때는 괜찮다는 달착지근한 위로가 좋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나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어주는 네가 있어 살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있다. 주위에 공기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소리가 사라지고 향도 없다. 그러다 점차 본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학교 가기 싫은 아이가 배가 아픈 것처럼 아랫배가 뻐근하고 호흡이 빨라지며 심장 박동은 손끝까지 느껴진다. 싫다.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고 살지만 그 역치가 낮은 사람들이 있다. 까다롭다고 유별나다고 예민하다고. 이건 신체적 특징이 아닌 사소한 성격적 특성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 고질병을 꾀병이라 불렀다. 한 동안 출근 꾀병을 앓았다. 심장이 가슴을 벗어날 것처럼 두근대고 그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랫배가 아프고 점심에는 무엇을 먹어도 곧 목덜미가 뻐근해지며 체한 증상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이것이 꾀병이라는 사실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만두어야지. 그만두겠습니다. 그만둘 겁니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말이 머릿속을 빙빙 돌며 집요하게 쌓여갔다. 결국엔 그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밀어내며 두통을 만들어 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담긴다는 말이 역으로도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나는 꾀병 하나당 일반의약품 하나씩을 자가 처방하여 먹었다. 소화불량에는 소화제, 두통과 복통에는 진통제.


 오늘은 말해야지 하며 일찍 출근 해 놓고는 새로 도착한 업무공지에 결국 퇴근 시간을 넘길 때까지 입을 떼지 못한다. 파티션 너머 바쁜 사람들을 보며 도저히 그만두겠다는 말이 입이 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 다치는 건 나뿐이었다. 그 말은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오롯이 나라는 것이다. 마음의 자해.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언제까지고 그럴 수 없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134p


  퇴근 후 소심하게 뱉어낸 말에 나보다 더 격하게 화를 내주는 사람을 만나 숨을 쉰다. 떠들지 못하는 멍청한 입 대신에 쉼 없이 뱉어내 주는 니 목소리에 하루를 더 견뎌본다.


  입안이 와글와글 시끄럽다. 연신 쏟아지는 빗소리 같은 시끄러움이 싫지 않다. 아니, 개운하기까지 하다. 한마디에 서운함이 박혀있던 가슴은 소리로 씻어 내린다. 짜증이 쌓여 울분이 된 마음이 눈으로 올라오기 전에 입에서 사라진다. 한때는 괜찮다는 달착지근한 위로가 좋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나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어주는 네가 있어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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