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문 여자.
빼꾸가 우리 집에 오기 전까지 나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매주 동물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보았고 배변훈련 방법과 시기별 예방접종까지 아이를 기다리는 임신부처럼 하나하나 알아두었다. 그건 언젠가 내 능력이 갖추어지면 반려견과 살고 싶다는 작은 바람 위한 준비였다. 빼꾸는 내 바람의 예고편처럼 찾아왔다.
엄마가 외가의 제사로 집을 비운 사이, 아빠는 친구에게 2개월 된 백구 한 마리를 분양받아오셨다. 얼마 전 혼자되신 큰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될 반려견이었다. 개를 풀어놓고 기르시던 세대라 강아지의 예방접종이 귀찮으실까 3차 접종을 마칠 때까지는 우리 집에서 지냈다.
처음으로 형제들과 헤어진 밤, 빼꾸는 우울하고 소심했다. 그러나 단 하루가 지나고는 온 집안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니기 바빴고 인형 뽑기로 모아둔 내 인형들은 녀석의 치발기가 되어 버렸다. 갓 젖을 뗀 새끼라기에 상당히 통통하고 묵직했던 녀석은 침대로 준비한 귀여운 쿠션이 너무 작아 안마의자를 차지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진돗개답게 배변을 2주 안에 가린 똑똑한 녀석이었는데, 종종 배변 패드와 이불을 구별하지 못했다. 어린 강아지의 실수지만 가끔은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빠가 치킨 냄새를 풍기며 줄 것처럼 장난을 치다 주지 않자 정확하게 아빠의 이불에 쉬를 하고는 아빠의 구두를 물어뜯었다. 이 녀석.
엄마한테 빼꾸가 혼날까 몰래 이불 빨래를 해도 좋았고 인형을 빼앗겨도 행복했다. 온 가족의 귀가가 빨라졌고 손이 많이 간다며 강아지를 반대하셨던 엄마의 쇼핑 목록이 달라졌다. 내가 산 빼꾸에게 너무 작았던 그릇과 옷이 엄마손으로 알맞게 바뀌었다.
그 보드라운 털과 짧은 주둥이, 촉촉한 코, 찬물을 먹고는 딸꾹질을 해대던 분홍빛 배, 옷만 입으면 불만 가득했던 표정.
단 하나의 문제라면 빼꾸가 동생과 나를 장난감 혹은 사냥감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빼꾸는 나와 동생의 손발을 그 피라니아 같은 유치로 매번 물었다. 특히나 동생은 만만히 보였는지 팔다리에 많은 구멍과 긁힌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 켈로이드 피부를 가진 동생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물리기 전까지는 새끼 강아지가 물어봤자라고 생각했지만 유치는 정말 뾰족하고 날카로웠다.(물고 흔들면 까무러치게 아팠다.) 몇 번 물리고 나니 이 정도 이빨이 났을 때 어미들이 젖을 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물릴 때마다 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방법도 써보았고 외면하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방법도 써보았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칼럼에서 어린 강아지들이 형제들과 일찍 헤어져 놀면서 세게 물면 아프다는 것을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는 글을 보았다.
그래, 이거다. 그렇다면 내가 형제가 되어 빼꾸가 물면 나도 문다.
그날, 장난을 치던 빼꾸가 내 손을 물었고 억지로 빼려고 했더니 흔드는 바람에 길게 긁힌 상처가 났다. 상처로 피가 송골송골 배어 나오는 걸 보자 이때다 싶어 빼꾸의 눈앞에 보여주고는 녀석의 앞발을 잡아 물었다. 사실 말이 물었다지 입에 가져가기만 했다. 털이 숭숭한 발을 입에 가져가기까지 온갖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얘가 산책을 다녀와서 발을 닦았던가, 목욕을 언제 했더라.
본능을 고쳐야 한다는 게 미안했지만 사람과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인형과 사람은 좋아하는 방법이 달라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해야만 한다.
빼꾸는 어리둥절 한지 잡힌 발만 휘적휘적 빼내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에 도저히 물 용기가 나지 않아 발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3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내 손을 입에 넣었다. 나는 "안돼."라고 한 후 빼꾸의 발을 입에 다시 가져갔다. 이번에는 이를 살짝 댔는데 복슬복슬한 털 밑으로 단단한 게 느껴져 머뭇거렸다. 빼꾸는 장난치는 줄 알고 버둥거리며 아까보다 더 신이났다. 그 모습에 큰 마음먹고 앞니에 살짝 힘을 주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녀석은 낑 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세게 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쩌지 못 해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개 발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도 우습고 내 마음도 몰라주는 빼꾸 때문에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이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동생은 웃음이 터졌다.
"엄마, 언니가 빼꾸한테 지고 울어."
그래 졌다.
저 2개월짜리 식육목한테 인간인 내가 졌다. 내 이는 어디로 보아도 초식동물의 것을 닮아 네모 반듯했고 육식 조상을 가진 녀석을 아플 만큼 물 용기도 없었다. 입술에 닿았던 숭숭한 털의 촉감이 서러웠다. 동물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하겠다던 장대한 목표는 뾰족한 이를 주지 않은 조상 탓으로 마무리지었다.
어설픈 이론이 개 발을 사람의 입에 넣는 사태까지 만들었다. 대체 이 사랑스러운 생명을 위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까.
빼꾸의 무는 버릇은 큰아버지댁에 간 후로도 한 동안 계속되었다. 자꾸 물어서 밉다며 데려가버리라고 하셨지만 마당에서 기를 거라던 빼꾸는 성견이 된 지금도 방안에서 지낸다. 사랑받으며 잘 크고 있다. 이 영악한 귀여움을 가진 녀석. 나를 개를 문 여자로 만들어 버린 강아지. 우리 못된 빼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