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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11. 2016

열두 번째 잔, 아포가토

온도의 맛 


  따뜻한 에스프레소에 정성 들여 둥글게 만든 바닐라 아이스크림 구의 표면이 사근사근하게 녹았다. 작은 스푼으로 표면을 살살 긁어내 함께 떠 입에 넣으니 쌉쌀하고 달큼하다. 오묘한 질감에 반짝이는 얼음 알갱이가 혓바닥에서 차게 튄다. 너무 차지 않고 너무 뜨겁지 않다. 이렇게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을 혀 위에 얹어두면 그리 차가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차게 식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그리 뜨거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태양에게 폭행당한 것 같은 날씨가 여름내 이어져 잠들지 못한 몸은 멍든 것처럼 불편했다. 다행히 이른 추석을 넘기고는 에어컨을 쉬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버를 씌우지 않았다. 그러나 염려가 무색하게 이불 밖으로 나간 발끝이 시리다. 폭염만 물러가면 살만 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두터운 옷을 준비할 새도 없이 부는 찬바람에 시큰한 콧등 아래로 말간 콧물이 흐른다. 새벽바람에 감기가 날려왔나 보다.


  할일없이 책상에 앉아있던 주말, 그날 자격증 시험을 본다던 친구는 책을 샀다며 수줍게 든 두 권의 책을 든 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시험은 어땠는지, 기분은 어떤지 물어볼 이유가 사라졌다. 도서명이 나긋한 목소리로 읊었다. 

아직은 몰아치는 폭염 뒤에 숨만 겨우 쉬며 붙어 있다고,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면 살만하지 않겠느냐고.  


[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까]

[자존감 수업]


제 탓밖에 할 줄 모르는 여린 마음에 답신으로 마땅한 위로가 없어 지금 읽고 있던 책을 찍어 보내주었다.


[만약은 없다]


'여름이 지나면 살만 할까?'

'아니 겁나 추워.'


  며칠을 제시간에 퇴근 하지 못 했으면서도 꼬박 밤을 새워 시험을 준비하고, 벌건 눈으로 마킹 펜을 내려놓으면서도 못 잔 한 숨의 잠보다 더 준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무릎 위로 얹어둔 위로 같은 책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에 기대어 감은 눈꺼풀이 뜨끈하다. 너의 가슴은 헛헛하고 식도가 가칠하다. 


제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죽을 만큼 뛰어야 한다더니
내가 힘든 이유가 내 욕심 때문이래. 


  치열하게, 뜨겁게, 열성적으로, 갖고 싶었던 것이 손끝에서 아른거린다. 애쓸 때마다 가슴이 시큰거리며 차게 식는다. 발판을 차곡차곡 쌓아 놓고 올라서면 저 담 밖이 보이는 줄 알았더니 올라선 높이만큼 담이 높아졌다. 

그래서 저 밖에 뭐가 있다고?

어쩌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는 작은 소리로 말하며 딸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품 안의 그녀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필립 로스 [에브리맨] 83p  


  따뜻한 에스프레소에 정성 들여 둥글게 만든 바닐라 아이스크림 구의 표면이 사근사근하게 녹았다. 작은 스푼으로 표면을 살살 긁어내 함께 떠 입에 넣으니 쌉쌀하고 달큼하다. 오묘한 질감에 반짝이는 얼음 알갱이가 혓바닥에서 차게 튄다. 너무 차지 않고 너무 뜨겁지 않다. 이렇게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을 혀 위에 얹어두면 그리 차가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차게 식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그리 뜨거울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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