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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24. 2016

열 번째 잔, 생맥주

쉼표의 맛

 
따끔한 탄산이 혀끝에서부터 목청까지 전기처럼 지나가고 메마른 식도가 촉촉해졌다. 명치끝에 걸려 있던 울화는 폭죽처럼 터져 흩어지고 마주 보는 상대의 반가움이 감미료처럼 맥주에 뿌려졌다. 코는 금세 무뎌지고 우리는 냄새를 잊었다. 한잔으로 시작한 자리는 며칠 굶은 허기처럼 다음 잔을 불렀다. 우리는 알큰하게 취한 두 볼이 부끄러워 웃었고 잔에 얼마 남지 않은 맥주도 웃었다. 다음 잔도 이리 웃어 줄까.


 성인이 되기 전에는 맥주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짱구의 아빠는 퇴근 후 저녁 먹기 전에 꼭 병맥주를 마셨고 CF에서는 섹시한 연예인들이 세상에 이보다 더 시원한 것은 없는 것처럼 맥주를 마셨다. 투명하고 날씬한 컵에 바닥부터 부서지듯 쌓아 올라가는 갈색 음료는 달콤하고 청량해 보였다. 그런데 실제로 마시게 되었을 때 웬걸. 일단 코를 막고 마시면 넘어가긴 했지만 손을 떼면 양말을 물고 있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처음 마신 커피는 쓰긴 했지만 향이라도 좋았지, 맥주라는 것은 냄새도 나쁘고 맛도 끔찍했다.

그때였다. 광고와 만화를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운 게.


소독약 같던 소주는 음식 냄새가 아니라 그렇지 살균 소독한 것 같은 깨끗한 느낌이 있었다. 그래, 소주는 이거 먹는 건가?싶었고 맥주는 이건 썩었다!고 생각했다. 맥주의 구리구리 한 냄새는 장마철 종일 신은 양말을 열흘 치 모아 우려낸 것 같았다. 짱구가 아빠의 발 냄새가 지독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게 맥주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년을 상한 보리차도 이런 냄새는 아닐 듯했다. 레몬향이 난다던 맥주도 꽃향기가 난다던 맥주도 뒷 맛에는 꼭 썩은 소변 같은 냄새가 났다.


 


만약 내가 술에 약한 체질이었다면 평생 맥주의 맛 따위는 알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의 술자리 후 나는 맥주캔을 들고 리포트를 쓰기 시작했다. 장문의 리포트를 위해서는 해가 지고 세로토닌이 퐁퐁 솟아나는 늦은 시간과 차가운 맥주 한 캔이면 충분했다. 따뜻하게 덥혀진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을 추듯 돌아다녔고 하얀 화면에 개미떼 같은 글씨들이 채워졌다. 과속하는 음주 리포트였다.

음주 리포트를 시작한 것은 단순한 실험이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던 술자리에 참여하고 나서 깨닫은 한 가지는 술이 말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도 없던 애가 어디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모를 만큼 말을 쏟아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수록 고사리처럼 말려드는 사람들을 맨 정신으로 지켜보면서 나에게도 저렇게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버텨야 했던 시간을 삭혀내 마셨다. 이 지독한 냄새는 가슴속에 막혀 있던 것들이 시원하게 씻겨 나오느라 풍기는 것이었다.


아직도 맥주 냄새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종종 즐긴다. 특히 오늘같이 더운 날, 맥주가 간절하다.

기분 좋은 날, 한숨 푹 자야 하는 피곤한 날,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날.

가슴부터 시작되는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맥주를 대체할 것이 없다.


짱구의 아빠가 퇴근 후 마시는 맥주는 힘들었던 하루를 씻어내고 내일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끔한 탄산이 혀끝에서부터 목청까지 전기처럼 지나가고 메마른 식도가 촉촉해졌다. 명치끝에 걸려 있던 울화는 폭죽처럼 터져 흩어지고 마주 보는 상대의 반가움이 감미료처럼 맥주에 뿌려졌다. 코는 금세 무뎌지고 우리는 냄새를 잊었다. 한잔으로 시작한 자리는 며칠 굶은 허기처럼 다음 잔을 불렀다. 우리는 알큰하게 취한 두 볼이 부끄러워 웃었고 잔에 얼마 남지 않은 맥주도 웃었다. 다음 잔도 이리 웃어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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