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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Nov 19. 2020

열여섯 번째 잔, 콜드 브루

묵혀둔 글이 매끄럽길 바라는  맛

에스프레소의 벨벳 같은 부드럽고 보송한 맛이 어쩌다가 이리 매끈해졌나. 그 보드라운 털과 결을 이리도 반짝이게 밀어, 매끈한 그 맛이 어색하게 지나가며 텁텁한 혀를 가볍게 만든다.
가벼운 맛이라 그 안에 담긴 시간도 가벼울 줄 알았다. 은은하게 만나 스미는 줄도 몰랐던 시간이 쌓였다.
우린 아마 이렇게 만날 것이다.  


 글을 쓰기가 힘들었다.

아마 처음 맛본 약간의 성취에 취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다음 글들이 입을 쓰게 만들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취라 하기는 애매한 조회수였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며칠 뒤 기다라던 승인메일을 받았고, 그렇게 처음 쓴 글이 운 좋게 모바일 다음에 걸려다. 그날 오후 휴대폰 알람이 쉬지 않고 울려댔다. 조회수 100을 돌파했다는 알람 뒤로 10,000을 돌파했다는 알람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한동안은 즐거워서 써댔고, 그보다 오랜기간 쓰지 못했다. 첫 번째 글에 미치지 못하는 조회수에 아무거나 쓰면 안 된다는 아집이 자리 잡았고 어느 것도 쓰지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쓰지 않는 날들, 입이 쓴 날들  

커피를 마신 뒤처럼 입이 텁텁하고 혀에 산미가 올라 불쾌 해졌다.

씻어 내 버릴까 생각을 하다 다음 잔을 마시기로 한다.


다시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오랜만에 앉은 거실 소파에서 돌아가던 TV 채널을 붙잡은 강렬한 인상을 만난 뒤였다.

[일간 이슬아]

오묘한 표정의 그녀가 컴퓨터 앞에 앉아 필사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표정은 냉정했고 손가락은 열정적이었다. 매일 한 편의 수필을 뽑아내기 위해 마감시간 직전에 자신을 몰아붙인다 했다. 방송의 끄트머리에 틀어 3분 정도 본 그녀가 계속 떠올랐다.


나는 나를 창작자로 만들었던 이야기들도 떠올려 보았다. 걔랑 그런 얘길 한참 하고 싶었다. 각자의 몸을 정면으로 통과한 이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말하느라 막차를 놓치고 싶었다.
 -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 점잖은 사이 中



쓸게 없다고, 할 말이 없다고, 읽은 책이 없다고, 시간이 없다고.

쓰지 않을 이유가 넘쳐나지만 사실 써 본 사람들이라면 이미 안다.

쓸게 있어서 앉는 게 아니고, 앉아서 써지는 거다.

글이 가득 차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해보지만 결국, 내손으로 써야지만 만들어지는 게 글이었다.


 에스프레소처럼 고압으로 뿜어져 나오는 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열정이 없었는 걸.

찬물에도 커피는 만들어진다. 조금 오래 걸리겠지만 그 나름의 맛이 누군가의 입에는 맞겠지 생각해 본다. 

천천히 오래 만들어 보려 한다.  느려도 매끄럽게 만들어진 콜드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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