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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anmary Mar 08. 2024

언니 오늘은 양장피를 준비해 봤어요

작은 유리컵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삶

나는 한때 배민의 VIP였다. 

매일매일 배달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오늘은 피자였고 내일은 햄버거였다. 넓은 주방이 딸린  25평 오프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었지만 어쩐지 요리는 친해질 수 없는 친구 같았다. 엄마는 집에서 건강하게 해 먹어라고 말했고 난 노력하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엄마집에 갈 때마다 엄마는 물었다. 아직도 김치 남았어? 아직도 들기름 남아있어? 왜 아직도 양념들이 안 떨어졌을까? 김치와 반찬과 양념을 챙겨주는 엄마는 매일 밥을 해 먹는다면서 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느냐고 궁금해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반려암이 2개나 있으면서도 한 달에 12번이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딸은 없으리라 (아참, 엄마는 내가 반려암을 2개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저 한 개를 키우고 있다고만 알고 있다.) 


오늘도 배민을 켜고 무엇을 시켜 먹어볼까 고민해 본다. 아무리 봐도 별로 먹고 싶은 것도 없어서 앱을 열고 닫기를 여러 번, 하지만 또 그냥 아무것이나 시켜서 한 끼를 때워본다. 이게 과연 내가 원했던 삶일까? 매일매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나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은 그저 여유롭고 한가로웠지만, 사실 나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방황 속에 있었다. 


목적이 없고 목표가 없는 삶은 처음이었다. 매일 해야 할 일이 있는 삶이 없고 매년 마쳐야 하는 일이 있는 삶이었다.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 공부했고 대학을 갔다 (그다지 엄청 좋은 대학교는 아니었지만). 좋은 직장을 잡고 싶어 공부도 했다.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 매달 나오는 월급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 이건은 진실이다. ). 그러다 처음 살게 되었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삶. 그저 몇 년이라도 아무 걱정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다 가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어쩐지 마냥 행복한 것 같지 않았다. 나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음식이나 먹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의미 있게 살고 싶은데라고 생각할 무렵, 그녀의 집에 갔다. 


언니, 밀키트지만 양장피를 해 봤어요. 


정말 오랜만에 서울에 나가는 날이었다. 운동모임에서 알게 된 그녀는 7살 아래, 회사에 저런 후배가 있으면 참 일할만 나겠다 싶을 정도로 싹싹한 그녀였다. 집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무르익을무렵 그녀는 소위 ‘등기를 쳤다’며 집을 샀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생애 첫 집을 축하하기 위해 와인파티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라도 밀릴까 봐 좀 서둘렀더니 5시 30분도 안된 시간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녀의 집에 들어섰는데 맛있는 냄새가 난다. 


‘뭘 하는 거야? 설마 음식을 만들고 있는 거야? 우리 배달음식 시켜 먹기로 했잖아’ 


지글지글 고기를 볶아내고 있던 그녀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언니 요리도 아니에요. 그냥 밀키트 조리하고 있었어요. 이따 오빠들 오면 배달음식 시킬꺼긴 한데 조금 부족할 것 같아서요. 음식 오기 전에 먹을 것 좀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언니 오빠들 초대했는데 하나라도 직접 한 음식을 대접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는 오늘을 위해 휴가를 썼다고 했고, 즐거운 저녁자리를 위해 간단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달 전의 저녁자리가 생각났다. 백조였던 나는 그녀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모두 배달음식이었다.  화이트와인과 함께 먹은 애피타이저로는 숙성회로 준비했고, 메인 음식으로 스테이크와 파스타 그리고 피자를 배달시켰다. 고르고 고른 맛집의 레시피였다. 친구들은 코스요리를 먹는 것 같다고 진심으로 좋아해 줬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도 휴가까지 내서 손님대접을 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집에서 매일 놀고 있으면서도 그저 배달음식을 시켜 친구들을 대접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밀키트만 이용해도 이렇게 근사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데 나는 왜 정성스럽게 상을 차리지 않았던 것일까? 


집들이 선물로 그녀의 집에 사 간 것은 예쁜 유리잔이었다. 물컵으로 쓸 수 있는 작은 잔 2개와 술을 좋아하는 그녀가 맥주나 하이볼을 마실 수 쓸 수 있는 있는 중간 사이즈의 잔. 혼자 사는 그녀의 집이니 나처럼 그녀도 어디선가 얻어온 그릇과 컵과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집에는 여러 개의 예쁜 잔들이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그녀는 술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예쁜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것이 좋다고 했다. 어디서 주워온 것 같은 것은 없는 듯 보이는 그녀의 찬장. 슬그머니 우리 집 찬장을 떠올려보았다. 차를 살 때 받은 하얀색 머그컵 2개. 맥주를 살 때 받은 맥주컵 2개. 엄마 집에서 가져도 물컵, 촌스럽고 짝도 맞지 않는 그런 컵들이 내 눈앞을 가렸다. 왁자지껄 웃으면서도 나는 왜 조금 더 날 대접하며 살고 있지 않는 것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저녁이었다. 


고민이 않아던 그즈음,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으로 재생된 어느 영상에서 홍진경 님의 자존감에 대한 동영상을 보게 됐다. 


‘저를 우습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저는 제가 다른 사람에게 우습게 보이던 우습게 보이지 않던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꽤나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25만 킬로를 탄 작은 중형차를 오랫동안 타고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돈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이 예쁜 차가 아직 너무 잘 굴러가고 있으니 끝까지 예쁘게 타면 그게 행복이다라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명품 옷 하나 없이 보세 옷가게에서 나에게 잘 어울리는 2만 원짜리 티셔츠 한 벌에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보이는 자동차, 옷, 구두가 아닌 내가 베고 자는 베개의 면, 매일 입을 대고 마시는 컵의 디자인, 나의 집의 정리정돈을 채워 가며 나의 자존감이 쌓입니다. ' 


그녀는 나와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비슷했으나, 그녀와 나의 다른 점은 분명했다. 나는 남에게 보이는 부분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는 척했지만, 그녀는 남에게 보이지 않는 보는 부분에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내 삶을 돌이켜보게 됐다. 과연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매일 쓰는 그릇과 컵들은 날 행복하게 하고 있는지, 내가 오랫동안 머무는 나의 집은 나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나는 좀 다르게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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