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마실 때 글을 쓰는 것과 글을 쓸 때 맥주를 마시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면 ‘그냥 맥주 마시면서 글 쓰는 것 아냐?’ 생각할 수 있지만, 엄연히 내 경우는 후자다. 검은색 몰스킨 노트 옆에 사라사 펜을 놓는다. 글쓰기의 기본 재료가 준비되었다면 냉장고를 열고 작문을 함께할 오늘의 맥주를 고른다. 찬장을 열어 선택한 맥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잔을 고른 뒤 적당히 따라 노트 옆에 두면 준비 완료! 노트북이라면 맥주를 따르기 전에 전원을 켜두는 게 좋다.
팽팽하게 연결된 생각의 이음새를 살짝 헐겁게 하면서 정신은 조금은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준다. 캔을 딸 때 들리는 경쾌한 딸깍 소리는 이제부터 글을 쓰겠다는 신호음이다. 맥주와 함께 문장을 써 내려가면 어떤 때는 생각의 흐름대로 쓰기도 하고 본래 향하던 곳에서 방향을 틀어 다른 항구에 정박해 더 오랜 시간 머무르기도 한다. 원래 쓰려던 글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괜찮다. 백스페이스나 취소줄이 있으므로 얼마든지 쉽게 지울 수 있다. 글 쓰는 사람이 대개 겪는 문제는 첫 문장을 쓸 수 없는 것이지 다른 글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10pt, A4용지 한 장짜리 글이라면 500 ml 한 캔이 적당하다. 375ml는 아주 짧거나 이미 어딘가에 쓴 글을 옮겨 적을 때는 괜찮은데 새로운 글이라면 다소 부족하다. 맥주는 감정을 고양하고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모래시계이기도 한다. 어쨌든 한 캔을 다 비우면 글쓰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소설 쓰기에서는 이를 '주인공이 다리를 건너왔다'고 한다. 뒤돌아봤을 때 이미 내가 건너온 다리는 부서지고 없으며 그때부터 사건이 시작된다.
맥주가 더는 남아있지 않을 때,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 군단이 어느정도 정렬되어 있다면 다행이다. 완성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퇴고는 맨정신에 하는 게 좋기에 쓴 글을 바로 발행할 필요는 없다. 맥주를 마시면서 하는 글쓰기의 목적은 어쨌든 다음에 열었을 때 새 문단을 추가하지 않고 제법 글처럼 보이는 글의 분량을 확보하는 일이다. 한 영화감독은 멀쩡한 자기 집을 두고 PC방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고 한다. 자신을 굳이 시간의 제약과 외부인의 시선 등이 있는 환경에 둠으로써 제한된 시간 안에 집중력을 쏟게 만든다. 얼마 전 속초의 한 호텔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일이 많았던 반려인은 새벽까지 호텔의 작은 사무용 데스크에서 노트북을 켜고 제안서를 썼다. 다음날 그에게 어제 얼마나 했냐고 물었더니 생각 외로 많이 썼다. 낯선 환경 때문인지 혼자에게만 떨어지는 핀 조명이 집중력을 향상한 것인지 집에서 보다 잘 써진다고 했다. 작업할 때 아주 편한 사적인 공간 보다 어느 정도의 낯설거나 제약을 주는 곳이 효율성을 높여준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지난 여름 무렵 펍에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얼마 전 보았던 영화들에서 주인공이 일기나 소설을 쓸 때 꼭 무언가를 마시는 장면이 나왔다. ‘로마의 휴일’을 쓴 작가 트럼보는 담배를 피면서 위스키를 마셨고(영화 <트럼보>) 영화 <퍼스트리폼드>에선 에단호크가 일기를 쓰면서 위스키를 마신다. 확실히 글과 술의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긴밀했다고 볼 수 있다.
자, 이제 마지막 한 모금을 넘겼다.
* 오늘의 맥주: 속초 수제맥주 몽트비어의 스타우트. 진하고 달콤하며 부드럽다. 쓴 맛보다 단 맛이 좀 더 확실하게 닿는다. 맛은 커피 보다 초콜릿에 더 가까운데 마실 때 코를 벌름거리면 커피향이 들어온다. 커피와 초콜릿을 좋아하는 이에게 최적의 맥주다. 6.8%로 도수가 낮지 않아 가벼운 맥주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좋다. 초콜릿 향이 나는 부드러운 질감의 스타우트를 최근에 즐겨 마시고 있어 아주 입맛에 잘 맞는다.
여름에는 주로 꽃과 과일처럼 상큼한 향이 나는 에일류나 필스너를 찾게 되는데, 기온이 낮아지면 브라운 에일이나 스타우트가 마시고 싶다. 맥주의 색이 가을빛을 닮아서이기도 하고 어쩐지 몸이 허하니 기운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닐까. 국내 수제맥주 회사들이 맥주는 잘 만들어도 디자인이 아쉬운 곳이 많은데 몽트비어는 mont(프랑스어로 산을 의미)라는 단어를 산 모양의 로고로 감각있게 잘 만든 것처럼, 병의 디자인도 하나같이 맥주의 특성을 잘 반영했다. 특히 이 가는 폰트를 가장 중요한 맥주 이름 쓸 때 적용했다는 것만으로 디자인을 아는 이의 선택이라 볼 수 있다. 디자이너에게 보너스를!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