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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Jan 28. 2021

지상낙원 파키스탄 '훈자'에서 죽을 뻔한 이유


살면서 딱 한 번 풍경을 보고 운적이 있다. 설산을 배경으로 팝콘 같은 연분홍 살구꽃이 망울 망울 매달린 살구나무와 빛바랜 초록의 잎을 처연하게 늘어뜨린 목이 긴 미루나무가 어우러진 계곡 높은 곳의 마을, 훈자에서다. 굽이굽이 가파른 길을 돌고 돌아 나타난, 십년이 지나서도 잊을 수 없는 그 풍경을 보고 나는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지상낙원, 천국, 무릉도원 같은 이름을 빌려와도 손색없을 장면이긴 했지만 아름답다고 울기까지 하다니? 그것도 늘 그리워하며 바랐던 풍경도 아닌 처음 마주한 풍경을 보고? 나는 그때까지 눈물은 '감정적'인 데서 연유한다고 생각해서 눈물 스위치를 누를 정도의 슬픔, 기쁨, 분노 등 만이 눈물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었다. 훈자를 도착한 그 날, 사람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마주했을 때 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사실, 그 눈물의 이유에는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를 마주한 감동'도 있었지만 라호르에서 출발해 빠르면 20시간이면 갈 수 있는 훈자를 2박 3일에 거쳐 가까스로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약간의 지분은 있을 것이다.



훈자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나를 괴롭히던 설사가 무엇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중간중간 휴식을 취할 때나 여권 검사를 할 때 나는 그 누구보다 먼저 버스를 박차고 나가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찢어질듯한 복통과 버스 의자를 뒤로 심하게 제껴대는 똥매너 앞사람과 내 의자 아래에서 스물스물 풍겨오는 뒷사람의 퀘퀘한 발냄새까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쉬지 않고 하루를 꼬박 달려온 버스는 돌산으로 둘러쌓인 좁은 흙길에 정체되어 길게 늘어선 차량들로 인해 멈춰섰다. 교통 체증이란 게 있을리 만무한 길이어서 무슨 일인가 싶어 모두 목을 빼고 밖을 살펴봤지만 차의 꽁무니만 볼 수 있을 뿐,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가서 살펴보니 거대한 낙석이 길을 막은 탓에 차들이 지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길 한가운에 얄궂게 자리를 차지한 돌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원망보다는 사고없이 무탈하게 굴러 떨어졌다는 사실에 고맙다는 거였다. 버스 밖에 나가서 앉아있는데 찌린내가 진동하는 통에 다시 차에 타니 산소가 희박해 숨을 쉴 수 없는데다가 구린내까지 합세해 내 숨통을 조여왔다. 숨막힘과 찌린내의 막상막하의 대결에서 찌린내를 선택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흙길 한복판에서 다들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바닥에 철푸덕 앉아있거나, 아빠 다리를 하고 앉거나, 다리를 쭉펴고 있거나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세를 취하던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자세로 바뀌어갔다. 하나같이 무릎을 세워 가슴에 붙이고 다리를 감싸앉은 모습을 하고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작은 동그라미 같았다. 고양이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둥글게 말고, 고슴도치는 무언가에 위협을 받을 때 몸을 동글게 만다는데, 우리는 불안과 초조함에 몸을 동글게 말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현지인들은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하고 버스비 70루피를 환불 받았다. 흙 길 아래 깊고 경사가 가파른 구덩이로 쪽으로 하나 둘 내려가기 시작했다. 낙석 위를 뛰어 넘을 수 없으니 경사진 길로 내려가고 다시 경사진 길로 올라와 낙석을 피해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내려가는데 그 경사가 어찌나 가파르던지 한걸음 한걸음 내디며 온갖 생각을 했다.


'이걸, 어떻게 걸어?' '이러다 죽을 거 같은데.' "고꾸라질 것 같아." "흙 낭떨어지에서 구르면 다치지는 않을까?"


밤새 내린 눈을 걷듯 푹푹 흙에 발이 빠지고 돌이 굴러 떨어지는 그 치열한 전장에서 나는 운동화 끈을 꽉 매고 자세를 낮춰 암벽등반 하듯이 돌을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올라가는 일은 내려가는 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더 고난이도 였다. 지나친 경사에 추진력을 잃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우리는 빨간색 체크 스카프처럼 생긴 구트라를 머리에 쓴 현지인 오빠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가방을 들어주고 접촉을 피하기 위해 직접 손을 잡아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닌 구트라를 이용해 마치 밧줄처럼 우리를 끌어당겨 꽤 긴거리를 견인했다. 흙산 사이를 관통하는 협곡의 옅은 물줄기는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으로 인해 습습하고 후끈한 기운을 뿜어냈고, 강한 자외선과 힘든 여정으로 인한 고통, 간헐적으로 배를 찌르는 불쾌함, 축축한 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꾸 모래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다리에 난 다 포기하고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아졌다. 다들 한 명 한 명 올라가는데 나는 도저히 몸을 움직이지 못해 제자리걸음을 하며 마지막까지 남았다. 몇명이 더 합세해 도와줘 나는 안간힘을 짜내 가까스로 길에 올라갈 수 있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인 나를 구경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나는 짧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을 정복했다.


"슈크리아"

"응?"

"슈크리아(좀 더 크게)"


우루두어로 감사한다는 인사를 전했지만 못알아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오빠에게 다시 크게 슈크리아라고 외치자 그는 피식 웃으며 등을 바로 돌리는 무심함을 보였다. 나를 도와준 오빠는 장르노를 닮았는데 그는 고지식한듯 자신의 원칙이 있고 카리스마가 있고 쿨한 사람이었다. 길에는 버스와 트럭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자연스레 큰 버스에 올라탔는데 그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했다. 파키스탄 장르노 오빠의 도움으로 우리는 가격이 저렴한 트럭으로 옮겨탔다.



황량한 흙산과 절제된 색의 펀자비를 입은 아저씨들과 빵모자를 쓴 흰수염 할아버지가 트럭위에 쪼그려 앉아 각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주는 모습은 마치 이란 영화 <거북이가 난다>속 한 장면 같았다. 트럭에서 봉고로 봉고에서 스즈키로 갈아타는 우리를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고 호텔로 데려가고 가격까지 흥정해준 파키스탄 장르노는 쿨하게 퇴장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생색도 내지 않는 그의 호의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그 날 밤 나와 나의 일행들은 불빛도 없고 샤워기도 없는 허름한 숙소에서 쪼그려 머리를 감고 불편하게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세시간을 더 버스를 타고 움직여 마침내 만난 게 처음 말한 훈자의 풍경이었다.


아, 파키스탄. 파키스탄 여행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 2008년 봄, 중국과 티베트를 거쳐 인도를 여행하던 나와 J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갑작스럽게 파키스탄행을 결정했다. 길위의 사람들이란 어찌나 즉홍적이고 난데없는지, 뭐 그래서 길위의 사람들을 좋아하는 거겠지만. 파키스탄 이라는 이름이면 자연스럽게 딸려 오는 '테러'. '이슬람 무장 단체' 같은 무시무시한 키워드로 잔뜩 겁을 먹었지만 호기심이 겁을 이긴 탓에 10명 정도 큰 무리를 형성한 우리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지대의 마을인 암리차르부터 라호르, 이슬라바마드, 훈자까지 그 여정을 같이했다. 파키스탄에서는 라호르 숙소에서 매일 밤 열리는 파티나, 남녀 이용하는 층이 나눠져있는 샤만 아이스크림, 숙소 근처에서 상냥한 미소를 곁들여 팔던 맛있는 케밥, 무굴제국 시대에 지어진 압도적인 모습의 바드샤히 모스크, 호전적이며 밝은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던 펀자브 대학교, 신을 만나는 집단 광기를 생생하게 볼 수 있던 수피나이트 까지 기억에 남는 크고 사소한 순간들이 많이 있는데, 파키스탄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훈자였다.



훈자를 진입하던 봉고차 아저씨는 운전 기사이자 마을의 심부름꾼이었다. 마을 곳곳에 들려 사람들의 간지러운 부분들을 긁어주었다. 여기에 서서 철판을 건내주고, 저기에 서서 거대한 자루를 건내주고, 슈퍼에서 산 물건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정겹기 그지 없는 산골마을의 얼굴은 다정하고 순박했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훈자의 시간은 평안하고 고요하게 흘렀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다시는 못볼 이 풍경을 눈과 머리와 가슴에 꼭꼭 담아두기 위해 최대한 있을 수 있는 만큼 훈자에 머물기로 했다. 훈자는 배낭여행 3대 블랙홀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원래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가만히 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훈자에서는 정말 할 게 없어서 원하든 원치않든 가만히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식당도 변변하게 갖춰진 지역이 아니라 밥을 먹을 때에는 자신이 묵는 숙소에 딸린 레스토랑을 이용해야 했다. 선택은 단 두 가지만이 가능하다. 베지냐 논베지냐. 방보다 밥값이 비싼 탓에 우리는 늘 고민 않고 저렴한 베지를 선택했다. 훈자에서 주로 묵었던 훈자 인과 하이데르 인 주인은 얼굴이 쪼글쪼글하고 빵모자를 쓴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 너무도 귀여운 할아버지였는데 그들이 직접 내오는 정찬 식사는 매일 메뉴가 다르고 메인부터 디저트까지 훌륭했다. 그 밥 때를 기다리는 것도 훈자에서만 느끼는 행복이었다. 훈자에서는 선택할 일이 잘 없이 할아버지들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자연스레 숙소 옥상이나 테라스에 앉아 짜이 한 잔을 하며 가만히 멍때리며 감동스러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훈자에서의 놀거리란 풍경뿐이라 딱히 할 일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놀이를 만들어내며 동심에 가까워졌다. 동네 문구점에서 가서 연필과 공책을 사고 안쓰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풍경을 보다가 그 풍경에 감동해 사각사각 연필로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렸다. 아랫마을 알리아바드에 가서 닭죽을 사먹고 아랫마을에만 있는 트로피코 주스를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 먹는 것도 그 당시 우리의 큰 유희거리였다. 단체로 우루루 몰려가서 할아버지들이 쓰는 빵모자를 공동 구매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머리 위에서는 그토록 귀엽던 모자는 우리 모두에게 지독하게 안어울렸다. 하이데르 인 할아버지가 후식으로 만들어준 커스터드가 어찌나 맛있던지 우리는 가게에서 직접 커스터드 가루를 사서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다. 먹을만 했지만 할아버지가 해준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숙소를 나서면 요정같이 생긴 아이들이 어디서 날와왔는지 하나 둘 나타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빵끗거리며 심장 폭행을 무차별적으로 해대 심장을 부여잡고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뛰어놀았다. 숙소에서 가까워보였지만 막상 찾으러 떠나니 멀고 멀었던 훈자 리버도 탐험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울리는 아잔 소리는 우렁차지만 서글픈 구석이 있어서 장례식장의 곡소리 같다는 생각을 이따금 했다. 할아버지들은 매일 반복되는 그 행위가 지겹지도 않은지 늘 성스러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가본 관광지는 카리마바드 시내에서 멀지 않은 발티드 포트 뿐이다. 풍경으로 벅차고 별 거 하지 않아도 행복했던 훈자의 나날에서 가장 잊지 못하는 두 개의 순간이 있다. 테라스에 드러누워 갓 만든 뜨거운 짜이를 한 모금 들이키는데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살구꽃이 후두두둑 흩날려 짜이에 꽃잎이 하나, 내 얼굴 꽃잎이 하나 떨어졌던 순간, 그리고 옥상에 누워 비오듯 쏟아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애니악의 I love you를 듣고 이소라의 제발을 들으며 울고, 댄싱인더문라잇 노래에 춤을 췄던 그 순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천공의 섬 라퓨타>의 배경이라는 훈자에서의 생활은 현실 같은 건 따로 떼놓은 채 공중에 떠서 그 장소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만의 비밀스런 천국'이었다.


하지만 이 천국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필수적인 한가지 요소가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술이다. 파키스탄 체류가 길어지고, 훈자 생활이 이어지면서 술을 먹지 못하니 술에 대한 갈급함이 날로 커져갔다. 처음 10명으로 시작한 파키스탄 원정대는 이런저런 서로의 사정으로 쪼개지고 합쳐지고 떠나고 머무르고를 반복하다 세 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술, 너무 마시고 싶지 않니?"

"두말하면 잔소리지..."

"방법이 없을까?"

"인도를 빨리 가는 수 밖에..."


한숨 섞인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머리에 길기트에 있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가 스쳤다. 그곳에서 소주를 판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었던 게 생각난 것이다.


"길기트에 가서 소주를 구해볼까?"

"길기트면 세 시간이나 걸리는데? 왕복으로 치면 6시간이라고."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그 정도 수고는 할 수 있지 않나?"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결론은 금방 났다. 우리는 천국에 술을 밀반입해와 끝내주게 타락하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로 하고 우리의 6시간, 그러니까 우리가 셋이었으니 총 18시간을 허비하며 길기트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그 당시의 마음을 돌이켜본다면 허비보다는 '투자'라고 하는 게 맞겠다. 우선 훈자 카리마바드에서 알리아바드까지 스즈키를 타고 이동한 뒤 다시 미니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길깃으로 가는 미니 버스는 딱히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승객이 다 차야지만 움직인다. 꽤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렸지만 전혀 문제될 건 없었다. 3시간 넘게 달려가 도착한 길기트 게스트하우스의 한글 간판이 보이자 심장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만날 소주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에 보이는 것 없이 허겁지겁 집 안으로 들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소주 있어요."

"이거 어쩌죠? 소주가 없는데..."

"네?.....소주 때문에 훈자부터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오직 소주만을 보고 달려온 시간이었다. 소주...사실 난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소주를 좋아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소주는 그냥 주머니 가볍게 빨리 취할 술, 배부른 맥주의 도수를 높여줄 술 정도였고 다른 옵션이 있다면 거들떠 보지 않는 술이었다. 길기트로 오는 그 3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주를 간절히 원했던 시간일 것이다. 그 간절함만을 갖고 달려온 우리에게 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라니. 우리의 황망한 표정을 본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대안을 제시했다.


"그럼 혹시 훈자 워터라도 구해보시겠어요?"

"훈자 워터요?"

"네. 이 지역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술인데.."

"네!!네!!! 물론이죠."


소주가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은 곳에 또 다시 한 줄기 빛이 새어들어왔다. 그 당시 우리의 술에 대한 갈급함은 과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양잿물이라도 술이라고 속이면 의심않고 단번에 들이킬 기세였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의 친절한 안내로 우리는 하얀 비닐에 담긴 무색의 뜨끈뜨끈한 훈자 워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뜨끈뜨끈하고 몰캉몰캉하던 그 봉지의 감촉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갓 공장에서 뽑아온 듯 뜨끈한 게 좀 의아했으나 찬술 더운술을 가릴 때가 아니였으니 우리는 아기를 대하듯 조심스레 봉지를 보살피며 다시 3시간에 걸쳐 훈자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니 훈자워터는 적당히 식어있어 먹기 딱 좋은 상태였다. 한 방울이라고 떨굴까 집중해서 물병에 따르고 우리는 그토록 고대했던 술파티를 벌였다.


"짠~"


정체불명의 술, 훈자 워터의 맛은 정말 지독했다. 비릿하고 알콜향도 너무 심하고 쓰고 역했다. 단언컨대 내가 살면서 먹어본 술 중 가장 고약했다. 그렇게 끔찍하고 고약한 맛이지만 원치않는 장기간의 금주 끝에 마시는 술이라 한편으로 달콤했다. 우리는 세상 역겨운 맛에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입에 머금은 술을 어떻게 하면 목으로 재빨리 넘길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목으로만 넘어가면 몸에 퍼지는 알콜 기운이 찌릿찌릿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안주도 없었다. 말린 살구와 견과류, 비스켓을 쪼개 먹으며 독한 기운을 달콤함과 고소함으로 중화시키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신 술의 취기 만큼이나 위험하다는 낭만의 취기까지 빌려와 빨리 얼큰 취하는 걸 택했다. 오렌지색 조명을 켜고 귀가 녹아 내리는 음악을 무한대로 플레이했다. 문을 열고 테라스에 서서는 무수한 별이 하늘에 찍힌 점묘화를 바라봤다. K는 별자리 박사였기 때문에 J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처음, 지구과학을 공부했다. 이름을 몰라도 아름답지만 반짝이는 점들의 이름을 알고 그것들이 맺는 유기적인 관계를 알게 되니 한결 친근하게 느껴졌다. 몇 잔을 마시고 입 안이 얼얼하니 그 이후로는 술술 먹을 수 있다. 신난 마음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홀짝홀짝 훈자워터를 이름 그대로 물처럼 마셨고 평소보다 빨리 취했다.


'술을 마시고 바라보는 훈자는 더 아름다워 보였고 나는 오늘의 팔자좋은 신선놀음에 크게 만족하고 골아 떨어졌다.'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면 참으로 훈훈한 이야기였겠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깨질 듯한 숙취에 사경을 헤매다 올라오는 토를 참지 못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 다음으로는 J가 그 다음으로는 K가 그리고 또 나 우리는 바톤터치를 하며 폭죽처럼 산발적으로 터지는 대환장 토 파티를 이어갔다. 나는 토뿐 아니라 셋 중 유일하게 설사까지 했다. 위아래로 난리가 난통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 화장실만 들락거렸다. 아무래도 술욕심이 많은 내가 술을 가장 마셨던 모양인지 난 세 명 중 제일 오래 아팠다. 우리는 그 술은 공업용 알콜 일거라고 단정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섬뜩했다. 인도에서 불법 제조된 술을 마시고 사망하는 사건이 매년있다는 얘길 기사를 통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유통되는 술의 절반은 가내 수공업으로 만들고 알코올 도수를 높이기 위해 공업용 메탄올을 섞곤 하는데 메탄올은 소량이라도 섭취하면 실명, 간 손상, 사망을 유발한다고 했다. 나는 침상에서 몇날 며칠을 앓으면서 아침에 살며시 뜬 눈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옴에, 내 숨이 붙어 있음에 감사했다. 우리 셋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우리의 18시간을 갈아 만들어 구하고 꼬박 사흘을 숙취와 후유증에 시달리게 하고 목숨까지 담보로 내걸고 마신 이 술은 내가 살면서 먹은 술 중 가장 비싼 술일 것이다. 가장 비싼 교훈을 준 술이기도 하다. 얼마 후 여행사를 운영하는 친구 라힘이 우리를 식사에 초대했고 우리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훈자 워터를 다시 마주했다.


"나는 절대 다시 훈자 워터를 먹고 싶지 않아. 지난 번에 우리 모두 이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훈자 워터를 마셨다고? 어디에서 구했어?"

"길기트"

"나한테 말하지, 멀리도 갔네."

"원래는 한국 술을 구하러 간건데 대신 사온 거거든."

"어떻게 마셨어?"

"어떻게 마시냐니, 그냥 마셨지, 스트레이트로."

"그러니까 그러지. 이 바보들. 훈자 워터는 주스랑 섞어마셔야 해."

"아? 그래?"

라힘은 손수 포도주스와 훈자 워터를 섞어줬고 절대 훈자 워터를 먹지 않겠다는 방금 전에 한 말을 잊었다는 듯 나는 금붕어처럼 그 술을 마셨다. 확실히 주스가 섞이니 특유의 강한 알콜냄새나 비린맛이 가려져 훨씬 먹을만 했다.

"근데, 이건 공업용 알콜아니야???"

"아냐. 보통 오디로 만드는 걸."

라힘은 훈자 워터가 공업용 알콜이 아니라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사온 건 공업용 알콜이 상당 부분 섞인 듯 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숙취를 설명할 수 없다. 라힘이 섞어준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우리는 다행히 모두 멀쩡했다. 어떤 나라를 여행할 때 금기시 되는 것은 무조건 따를 것, 목숨이 아깝다면 출처가 불분명한 술은 절대 마시지 말 것, 아름다운 훈자에서 유일하게 착하지 않던 훈자 워터가 내게 남긴 두 가지이다. 근데,, 큰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진짜 천국에도 술이 없고 지옥 불구덩이에선 춤을 추며 술을 마실 수 있다면, 난 지옥을 선택해야 할까? 천국을 선택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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