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PD Nov 13. 2023

민주주의의 위기

너희가 뽑았으니, 너희가 책임져라. 2005년 7월에 쓴 글입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이제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미군 병사의 전사소식은 더는 뉴스거리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이제 매일의 일상이 되어,  전사자의 규모를 알려주는 ‘숫자’로 단순화되었고,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런 이라크 전쟁이 강의 시간에 거론될 때마다 슬쩍 미국 학생을 비웃습니다. 


    “이게 민주주의야, 너희가 뽑은 대통령과 행정부가 하는 짓인걸… 4년 더 기다려라.”


그럴 때마다 이곳 뉴요커들이나 지식인들의 대답은 마냥 웃음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반응에서 ‘어쩌다가 또 부시가 당선되었나?’ 하는 망연자실함이 느껴집니다. 이런 씁쓰레한 반응을 볼 때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래도 미국은 낫습니다. 지식인 사회가 살아있으며, 여러 의견이 다양한 경로로 표출되기에 화풀이나마 할 공간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란 골치 아픈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의 총리는 Silvio Berlusconi라는 이탈리아 최고의 부자입니다. 중산층에서 자란 머리 좋은 기업가는 건설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에 케이블 TV산업으로 손을 뻗칩니다. 1980년도부터 차례차례 이탈리아의 민영 방송을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같은 해에 Canale 5, 82년엔 Italian 1, 84년에는 Rete 4를 사들여 국영 TV RAI를 제외한 모든 민영 TV를 소유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소유한 부와 언론을 이용해 정치에 진출하면서 커집니다. 선거 두 달 전에 당을 만들고 합종연횡을 한 후 1994년 제1당으로 자신의 당을 올리고 수상 자리에 오릅니다. 연합 전선이 무너져 얼마 후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2001년 다시 수상의 자리에 올라 2006년 현재까지 유지하면서 이탈리아 공화정의 역사상 최장기 집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국영 방송인 RAI는 독립된 기관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손안에 있습니다. 권력을 쥔 Berlusconi는 마음껏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국영방송도 쥐락펴락 하고 있어, 사실상 이탈리아의 방송은 그의 손아귀에 독점적으로 들어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영향력은 자신에 정책에 대해 비판과 풍자를 한 언론인과 코미디언들이 다시는 카메라 앞에 서지 못하는 현상을 보면 자명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비슷한 모습을 본 적이 있죠.) 문제는 이 돈 많은 수상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은 자수성가한 그의 경력을 좋아하고 마치 그가 집권하고 있으면 이탈리아가 또다시 부강해질 것이라고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권력을 바탕으로 자기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여러 건의 소송에 연루되어 있음에도 말입니다. 또 그는 자신의 미디어를 교묘히 활용, 이탈리아 최고의 뉴스메이커이며 한편으로 그의 권좌를 유지하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핀란드와의 경쟁 끝에 한 국제회의의 개최지를 얻어낸 것을 자랑하며 “핀란드의 여 대통령인 Tar Halonen를 설득하기 위해 내 플레이보이 기술을 발휘해 부드러운 요청을 했다."라고 언급해 국제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국민이 좋아한다는데…. 이래서 그 누군가는 민주주의 위기, 포퓰리즘의 위험을 경고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언론의 독립이 중요한 것이고, 정부와 ‘선의의 경쟁자’로서 올바로 서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누구처럼 ‘악의’를 가지고 헐뜯어도 안 되겠지만, 공익을 위해 권력과 제대로 경쟁하는 ‘언론’의 역할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뽑아놨기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언로가 열려있는 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룰루스코니는 2011년까지 9년간 이탈리아의 총리로 집권했습니다. 한때 세계 경제 규모 5위의 대국인 이탈리아는 그의 재임하에서 실업률이 치솟으며 이탈리아 경제를 침체기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리더가 해서는 안될 일을 골고루 잘했습니다. 정경유착, 정언유착, 불법경영, 정적숙청, 포퓰리즘 등이 그의 경력에 가득 차 있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국가경영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이 없는 사람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산 증인입니다. 


아, 산 증인은 아닙니다. 그는 2023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2023년 11월 13일)

작가의 이전글 어떤 한국인의 위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