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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by 용PD

아버지가 떠나신 후 집을 정리할 때였다. 한 분이 평생 살아온 공간과 흔적을 정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가능한 한 버리지 않는 분이셨기에 물건이 많았는데, 특히 책과 서류가 많았다.

책은 정리하기 쉬웠다. 오래된 전문서적은 학문의 효용성이나 정보의 신선도가 떨어져서 손쉽게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메모나 글씨가 있는 공책은 쉽게 처분하기 어려웠다. 한때 수필을 쓰시던 취미가 있으셨기에 여기저기에서 아버지의 메모가 발견되었다. 내용을 읽어보고 보관할 필요가 있는지 하나하나 판단해야 했다.


그런데 책에 아버지의 메모가 남아 있으면 더욱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책 여기저기에 아버지가 밑줄을 긋고 메모를 남기셨기 때문이다. 이런 책이라면 남겨야 했는데, 서울대 암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이 쓴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책 표지는 손때가 묻어 있었고, 페이지 곳곳에는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펜으로 그어진 밑줄이 문장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고, 어떤 곳에는 별표가 그려져 있었고, 짧은 메모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 여백에는 아버지의 단정한 글씨로 '2021년 9월 23일 아침일독'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이 책을 완독 하신 날짜였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는 말기 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환자와 가족의 선택 순간을 기록한 책이었다. 연명치료를 계속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꺼져가는 환자의 삶과 지키려는 가족의 삶이 결국 죽음으로 갈라질 때, 다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수필이었다.


2021년 9월은 아버지가 아직 건강하셨던 시절이었다. 간암 진단을 받으시기 훨씬 전, 평범한 일상을 보내시던 때였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이런 책을 읽고 계셨는지 전혀 몰랐다. 왜 건강하신 분이 말기 암 환자에 대한 책을 읽으셨을까? 단순한 호기심이셨을까, 아니면 어떤 예감이 있으셨던 걸까? 아버지가 그어놓으신 밑줄을 따라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건강하셨던 시절부터 이미 죽음에 대해, 말기 환자와 남은 가족이 겪는 선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3년 후 본인이 실제로 그 상황에 처하셨을 때, 이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라는 부분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버지의 단정한 한자로 '事前延命醫療意向書'라고 다시 적어놓으셨다. 아버지가 얼마나 신중하게 이 개념을 받아들이려 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그즈음 천안 단국대학교 병원에 가셔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작성하셨다. 호스피스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이 서류를 미리 작성해 두셨다고 의료진에게 말했을 때, 불편한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료진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암 환자가 되어 병을 극복한 이가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내용의 문단 밑에는 '생존자들의 직업(취업)을 도와주어야겠다'라고 메모를 해두셨다. 아픈 이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문장에는 밑줄과 함께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 책을 읽을 때 이 말을 얼마나 깊이 새기셨을까.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가 너무 빨리 말기암 상태임을 알려드린 것은 아닌가 고민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밑줄을 그으신 것을 보고, 솔직하게 아버지께 말씀드린 것을 잘했다고 안심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하지만 2021년 그때는 본인에게 그런 일이 닥칠 줄은 모르셨을 것이다. 단지 인생의 보편적인 문제로서, 언젠가는 누구나 마주하게 될 문제로서 이 책을 읽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3년 후, 정말로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많이 떠올리셨을까?

항암치료를 하지 말자는 쪽으로 유도하는 장남의 말을 담담하게 들으셨다. 묵묵부답, 시선을 언제나 그렇듯 다른 쪽을 보고 계셨다. 그때 아버지는 이 책의 내용을 돌이켜보고 계셨던 것 같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셨거나,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의연하게 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모든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병세를 알게 된 며칠 후, 항암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셨다. '이제 아픈 것은 싫다. 중환자실은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정을 내리셨다.


이 책과 아버지의 메모를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와 다시 대화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게 해서 아버지를 일찍 보낸 것은 아닌가 하는 나의 죄책감을 덜어주셨다. 아버지는 무력해서 눈길을 돌리신 것이 아니었다. 두려워서 회피하신 것도 아니었다. 가족을 신뢰하셨고, 내가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는 주도권을 넘겨주신 것이었다.

내가 혼자 감당한다고 생각했던 그 무거운 결정을, 사실 아버지와 함께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다 아시면서 모른 척하고, 내 얘기를 들어주셨다. 그리고 무거운 결정을 내리셨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즈음에서 가장 진한 밑줄과 별표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남은 가족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이겨낼 것이고, 삶을 살아낼 것이다. 그 슬픔의 빈 공간은 나의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채워야 하는 각자의 몫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메모를 다시 바라보았다. '2021년 9월 23일 아침일독.' 그날 아침,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이 책을 덮으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설마 3년 후 본인이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모르셨겠지만, 분명 깊은 생각에 잠기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름대로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정말로 알고 계셨다. 건강하셨던 시절부터 죽음과 이별에 대해 미리 준비하고 계셨고, 정말로 그 순간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으시고 결정을 내리셨다. 그리고 우주의 초현실적인 배려로 아버지가 준비한 흔적을 돌아가신 후에 만나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몇 가지 마음의 짐을 덜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슬픔을 이겨낸 것으로 보인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혼자가 되신 어머니가 빈 공간이 많이 생긴 시골집에 가 계신다. 아이들은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나는 다시 드라마를 기획한다.

아버지가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그 상실감을 열심히 살아서 다시 채우라고 훈계를 하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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