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한국의 서울예술대학교에서는 좀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낯선 남방의 섬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건너 온 100여 가지 문양의 바틱을 주제로 퍼포먼스를 겸한 전시가 열린 것이다. 전시회의 이름은 <시간의 축적, 바틱>이었는데, 전시를 주관(한.인니문화연구원/재인도네시아 한인회)한 입장에서 보아도 감탄할 만큼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었다. 한 점의 밀랍이 떨어져 선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색을 품어 한 장의 바틱으로 완성되는그 모든 과정들이 그야말로 숭고한 시간의 축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시는 사공 경 원장(한.인니문화연구원)의 ‘숭고한 경지로 이끄는 명상의 매개체, 바틱’이라는 주제의 특강으로 문을 열었다.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바틱의 역사와 정신을 먼저 알리려는 의도로 간략하게 열린 특강에 이어 ‘바틱과 놀다’라는 주제로 바틱을 이용한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 쇼, 무언극 등이 차례로 공연되었다. 그 모든 시도들은 참으로 신선했다. 그들에게는 필시 낯선 이국의 문화였을 바틱에 대한 해석은 놀라울만치 자유로웠고 발랄했다. 인도네시아 가믈란과 한국의 전통 음악을 조화시킨 디제잉, 와양 꿀릿을 이용해 그림자 극을 형상화해 낸 무언극과 다채롭고 현대적인 미디어 쇼를 한데 묶어 한 판 근사한 놀이마당을 완성해 낸 것이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과 중압감 없이 그들만의 시각으로 재구성되어 눈 앞에 새롭게 펼쳐지는 예술적 소재로써의 바틱들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과 동시에 통쾌한 해방감 마저느꼈다. 바틱을 앞에 놓고 항상 진지하고 심각한 갖가지 화두를 내세우며 의미를 부여하기에 바빴던 우리들은, 그 날 발랄하고 자유로운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기분좋게 한 방 펀치를 맞았던 것이다.
▲ 바틱을 이용한 퍼포먼스 [사진: 한인니문화연구원]
바틱의 대중화
아닌게 아니라 바틱은 점점 제작 기법과 문양의 범위가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다. 우선 모든 제작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바틱 뚤리스(Batik Tulis. 쓰다 혹은 그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구리로 만들어진 도장으로 똑같은 문양을 찍어내는 바틱 짭(Batik Cap), 혹은 위 두 가지 방법을 혼합하여 제작하는 바틱 콤비나시(Batik Kombunasi)가 모두 바틱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요즘은 실크스크린으로 단지 바틱 문양을 디자인하여 찍어내는 의복들도 바틱 패션의 대중화에 기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바틱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근래 들어 인도네시아에는 바틱의 대중화가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도 생활 한복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비교적 간편한 디자인의 현대적인 한복들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종종 보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바틱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길거리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 만큼 바틱의 대중화에 성공했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바틱을 인도네시아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신적 상징으로 부활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초대 수카르노 대통령은 외국의 정상들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때마다 대통령 궁에서 바틱 전시와 시연을 펼친 것으로 유명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바틱 협동 조합(GKBI, GabunganKoperasi Batik Indonesia)과 족자카르타 바틱 연구센터를 설치해서 바틱 산업을 국가적 산업으로 일으키고 바틱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했다. 1965년 9월 30일 일어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제2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한 수하르토(Soeharto) 대통령은 급기야 바틱을 인도네시아인들의 일상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연구하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 정책으로 인도네시아 남성들의 공식 복장으로 바틱을 지정한 것이었다. 나라 안팎의 공식적인 행사나 모임에서 공무원을 비롯한 남성들이 바틱 셔츠를 입기를 권장하였고, 이는 바틱이 일상복으로 훌륭하게 재기한 것은 물론, 대중들 속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즉각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현재는 인도네시아의 정부 기관과 학교를 비롯하여 많은 기업들이 매주 금요일을 ‘바틱의 날’로 지정하여 일주일에 하루는 반드시 바틱을 입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 바틱 문양 중 솔로 문양의 예 [사진: 한인니문화연구원]
▲ 바틱 문양 중 쁘깔롱안 문양의 예 [사진: 한인니문화연구원]
바틱 문양의 지역적 특성
바틱은 주로 중부 자바의 족자와 솔로, 쁘깔룽안, 찌레본 등에서 지역마다 독특한 문양들이 개성있게 발전해 왔다.
족자는 청색(Indigo)과 흰색 그리고 갈색(소가 Soga)으로 대표되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왕조 중심의 바틱 문양이 철학적 의미를 담고 발전했다. 우리가 전통 바틱으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문양들은 족자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쁘깔룽안은 해안도시이면서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자유롭고 이국적인 문양의 바틱이 발달하였다. 상업이 발달했던 만큼 외국인들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바틱 문양을 개발하고 이를 산업화하여 유럽 등으로 수출하는데 힘썼다. 그러면서도 바틱이 단순히 교역 상품으로 전락하지 않고 예술적 가치를 얻을 수 있도록 바틱마다 디자이너의 서명을 새겨 넣는 작업을 1800년대부터 이미 시도하였다.
솔로는 족자와 비슷하게 갈색과 흰색을 주로 쓰지만 중부 자바 인들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 부드럽고 잔잔한 문양이 주를 이룬다.
찌레본은 해안 도시이면서도 왕궁이 있고 이슬람의 색채가 강한 곳이어서 종교적인 특성이 바틱 문양에서 많이 드러난다. 주로 구름(메가믄둥 Mega Mendung)이나 바다와 관련된 무늬가 그려진 대부분의 바틱은 찌레본에서 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경전의 내용을 바틱에 새겨넣는 경우도 많다. 찌레본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남성들이 바틱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보다 힘차고 대담한 문양들이 일찌감치 개발되었다.
▲ 일반인 착용이 금지된 바틱 문양 8가지 [사진: 한인니문화연구원]
왕조의 바틱, 금지된 8가지 문양
한편 18세기 족자와 솔로 왕궁에서는 왕조들만이 입을 수 있는 8가지의 바틱 문양을 지정하여 계급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엄격한 왕궁의 권위와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다. 지금도 족자의 왕궁에서는 일반인들에게는 착용이 금지된 여덟 가지 문양의 철학적 의미를 기억하며 그 전통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금지 문양의 바틱을 착용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지역적인 특색을 넘어서 전형적이고 정통적인 바틱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듯 시간은, 너무나 견고하고 단단해서 변혁의 시도조차 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수많은 삶의 법칙들을 종종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뜨리곤 한다. 아마도 조선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온다면, TV드라마에서 곤룡포를 제멋대로 걸치고 나오는 배우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조셉 캠벨의 이론을 따르자면, 무수한 시간이 흐르면서 금지 문양은 지나온 어느 시대의 삶을 전해주는 신화적 메시지로 우리 곁에 남게 된 것이다.
왕실에서만 착용이 가능했고 일반인들에게는 금지된 8가지 문양과 그 의미를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1. Kawung : 4개의 타원형과 중심의 + 모양은 우주의 근원적 힘을 상징한다. 타원을 이루는 마름모 문양은 힌두에서 우주를 이루는 5가지 원소를 의미한다.
2. Parang : 인도네시아의 전통 검 끄리스(Keris)를 상징한다. 문양에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되며 완전하고 신비로운 힘을 지닌 것으로 여겼다.
3. Paramg Rusak : ‘적을 무찔러 패배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빠랑 문양이 대각선을 이루도록 하여 우아하면서도 강한 힘을 나타내었다.
4. Cemukiran : 연꽃에서 유래된 문양으로 주로 바틱 천의 가장자리를 장식한다.
5. Sawat : 가루다(Garuda)를 상징한다.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비쉬누(Bisnu)가 타고 다녔던 신화 속의 새로,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는 큰 날개 문양이다.
6. Udan Iris : 비옥한 땅을 만드는 가랑비와 자연의 다양한 형태를 혼합하여 대각선으로 이어 그렸다. 풍작을 기원하며 신이 내리는 자연의 은총과 풍요, 번영을 상징한다.
7. Semen : 우주의 질서에 대한 자바인들의 믿음과 다산을 염원하는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다. 신이 살고있는 산, 명상과 철학의 장소인 사원, 영혼의 세계를 상징하는 날개, 세계를 이루는 여러 동물들과 다산을 의미하는 덩굴 손 등의 식물들이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다.
8. Alasalasan : 태초의 원시림을 상징하며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인내와 염원을 담고있다. 스멘과 비슷한 패턴을 이루고 있지만 신화적 문양이 좀더 강하게 드러나 있다.
▲ 바틱 염색 시연 [사진: 한인니문화연구원]
바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다
2009년 10월, 바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틱이 언제부터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어졌는지 그 기원은 확실치 않다. 바틱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자바의 서남부의 갈루(Galuh) 지방에서 발견된 두루마리 문서에서 처음 시작되는데, 약 1520년 경의 기록으로 밝혀져 있다. 바틱이 만들어진 기원 역시 인도에서 전파되었다는 설과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설, 수마트라 등지의 오지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설 등이 나름의 근거를 들며 전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7세기부터 인도네시아에는 이미 바틱을 통한 외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1972년에 이르러서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모든 국가적인 공식 행사에 바틱을 입을 것을 권고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유네스코가 바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유를 살피는 것으로 바틱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바틱은 그저 한 장의 천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들의 삶과 정신을 대변하는 아름다운 예술로 재탄생하였다. 아마도 유네스코는 바틱이 가진 문화예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삶에 깊숙이 관여해 온 일상성의 가치를 높이 산 것이리라 짐작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진 예술적 감각, 철학, 종교적 명상을 아우르는 삶의 예술로, 바틱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새로운 완성을 거듭할 것이다.
참고자료 및 사진: 한,인니문화연구원(재인도네시아 한인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커뮤니케이션
글: 채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