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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Dec 03. 2022

진실의 무게

- 안태진 감독의 영화 <올빼미> (2022)

  영화 <올빼미> 전체는 보는 행위가 지닌 무게에 대한 환유(換喩)이다. 이 작품의 타이틀이 올빼미인 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 어둠 속에서 가려진 진실을 응시할 의지가 있는지에 관해 관객에게 묻는다. 올빼미가 낮에 앞을 보지 못하지만 밤에 사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처럼 영화는 소현세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어두운 진실을 스릴러 문법으로 풀어냈다. 


  본다는 것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한자어로 견(見)은 ‘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정확히는 눈에 저절로 대상이 비치어 보이는 것이라면, 관(觀)은 어떤 대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행위를 뜻한다. 두 글자는 모두 ‘보다’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바로 두 글자의 의미는 대상을 향한 바라봄의 행위에 주체의 의지가 담겨 있는지에 따라 구분된다.    


  영화 <올빼미>는 “들어도 듣지 못했고, 보아도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등과 같은 대사를 통해 궁(宮)에서 살아남기 위한 금기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 말은 주체의 의지를 타자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궁은 지배자인 왕의 의지 이외에 그에 반(反)하는 의지를 들키는 순간 죽임을 당하는 공간이다. 궁은 살아남기 위해 주체가 의지를 잃은 인형처럼 행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종용한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이 같은 금기는 단지 궁에서만 통용되는 처세법은 아니다. 보이는 것을 외면하고, 들리는 것에 귀를 닫고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처세법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영화 <올빼미>에 등장하는 궁이라는 공간은 현실 사회의 알레고리라는 것을 곧 알아차리게 한다. 비록 앞의 금기가 우리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 세상을 편히 살아가는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도덕과 윤리는 구분되어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정한 제도적 규범적 틀을 어기지 않고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관념이라면, 윤리란 사회가 정한 도덕 규범을 넘어 자신의 신념을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 속에 자신을 기투(企投)하는 의지이다. 예컨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주인공 안티고네가 테베의 왕 크레온의 명령을 거부하고, 길바닥에 버려진 자기 오라버니의 시체를 수습해 무덤에 안장한 후 죽음이라는 처벌을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나타나는 숭고한 태도가 하나의 예이다.  


  이처럼 인간성의 숭고함은 사회가 정한 도덕 규범을 무조건 지키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신념을 외부로 실현함으로써, 그 사회의 도덕 규범과 제도의 모순을 드러내는 윤리적 태도에서 발생한다. 바로 그렇기에 진실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진실 그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으나, 그것이 우리의 저항적 행위를 정당화해주고, 죽음 속에 자신의 실존마저 걸 수 있는 윤리적 인간이 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영화 <올빼미>에서 맹인 침술사 경수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독살의 배후가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에게 실존적 결단의 순간이 도래한다. 과연 진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속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소현세자를 독살한 배후가 인조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대가로 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인가. 두 가지 갈림길에서 경수는 자신의 윤리를 포기하지 않고 신념과 대의를 위해 자신을 죽음 속에 던져 넣는다. 


  그럼 경수가 지키고자 했던 진실은 패배한 것일까? 이 작품이 더 현실적이라면 경수의 목이 베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겠지만 영화는 반전을 모색한다. 경수는 우여곡절 끝에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고 인조의 병마가 깊어질 때쯤 그는 침술사로 초빙되어 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죽어가는 인조의 사혈(死血)에 망설이지 않고 시침한다. 이때 경수는 촛불을 끄고 죽어가는 인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묻는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스크린에는 아웃포커싱(Out-Focusing)된 화면이 보이고 인조의 시선은 초점을 잃고 서서히 닫힌다. 이 같은 이미지는 인조가 추구한 욕망의 무의미함을 뜻하면서도 그의 손에 죽어간 망자들의 시선이기도 하다. 바로 인조의 시선을 통해 죽은 망자(亡者)들이 되돌아온다. 억압된 진실은 사라지지 않고 유령의 시선으로 되돌아와 부정한 사회를 처벌하는 것이다.  


- 이 글은 롤링스톤코리아에 게재 예정된 글입니다. 무단 공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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