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Jan 21. 2024

크리처를 찾아서

-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크리처> (2023)

  넷플릭스 드라마 <경성크리처>에 등장하는 크리처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로 기능한다. 여기서 사라지는 매개자란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사라지는 개념’을 말한다. 이 작품에서 크리처는 드라마의 장르적 특이성을 구축하기 위한 구심점으로 작용하지만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와 무관하다. 어디까지나 크리처는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영화와 관객 사이에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질문을 찾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을 뿐이다.


  이처럼 드라마 <경성크리처>는 괴수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은 끌어모으지만, 정작 괴수는 전체 10회의 결말에 잠시 자신의 역할을 할 뿐 그 이전까지 서사의 진행과 큰 관련이 없다. 그럼 이 드라마의 진짜 질문이 무엇일까? 바로 ‘크리처를 찾아서’가 될 것이다. 이 드라마의 크리처는 기괴한 모습을 한 괴수가 아니다. 그 괴수는 서사 뒤에 숨은 환경으로 작용하는 은폐된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경성크리처>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731부대의 마루타 실험을 소재로 한다. 여기서 마루타는 공장 재료를 뜻하는 은어로 당시 일본이 조선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잘 보여준다. 조선인을 잡아다가 생체 실험을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드라마는 고발하면서도, 크리처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입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장르물로 재탄생시켰다. 탄저균에 전염된 인간들의 신체적 변형을 겪으며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폭력성을 시각화하면서도, 식민지 근대화라는 것의 균질성을 크러처의 오염된 신체를 통해 의문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드라마의 크리처는 정신분석 철학자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abject)를 연상시킨다. 크리스테바에게 아브젝트는 상징계로부터 배제된 오염된 것들을 말한다. 상징계라는 것은 여러 기호를 통해 의미화된 상징적 현실을 뜻하는데, 이것은 불완전하고 언제든 변화될 수 있는 불안정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상징계는 무질서와 오염된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의미화되고 구성되며, 이 말은 언제든 상징계는 변화될 수 있는 장(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아브젝트를 배제하고 추방을 뜻하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앞의 관점을 참고하면, 크리처는 억압된 무의식이 왜곡된 형태로 되돌아오는 ‘억압된 것의 귀환’(return of the repressed)으로서 괴수의 오염된 신체는 균질화된 일제강점기의 역사에 구멍을 내고, 그것의 불안정성을 시각화한다. 드라마의 초반부에 윤채옥이 신문을 통해 만주에서 일본이 패퇴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시작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겉으로 안정적으로 보이고 영원할 것 같지만 그 밑에서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가라앉아있음을 드라마는 암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 이 드라마의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짜 크리처의 정체는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시대정신을 상실한 시대의 폭력성이다. 이 드라마를 단순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크리처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폭력에 순응해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시대의 히스테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서사를 역사적 알레고리로 읽어내면 어떨까? 이런 관점을 본다면, 이 작품은 단순한 크리처물이거나 혹은 시대극으로 볼 수 없다. 시대정신을 상실한 현재 한국 사회의 히스테리적 증상을 드러내는 환유로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작품이 정신병적 드라마였다면 주인공 장태상은 환멸에 빠져 폐인이 되어 자살했을 것이고, 도착증적 드라마였다면 장태상은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목적인 속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히스테리적 드라마인 이유는 폭력적인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던 장태상이 환멸의 세계에서 소명을 발견하는 윤리적 인물로 변모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히스테리란 자기 존재의 무의식에 작용하는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주체의 반응이고 이것은 다시 말해 세상의 폭력에 대응하는 반성적 주체의 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작품이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언명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정신차려! 이 친구야. 괴물에 먹히기 전에. 좋은 사람은 못될망정 괴물은 되지 말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