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아론,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 (2023)를 중심으로
1. 물질적 전회
2020년대 이후 한국 문단은 물질적 전회(material tum)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물질적 전회란 인간 중심주의와 언어 중심주의에 대한 거부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물질적 전회 이후 인간 개념 대신 비인간의 사유를 그리고 물질적 조건을 언어화하는 담론적 사유 대신 물질 그 자체의 내재적인 힘과 역량, 능력, 행위성을 긍정하는 이론이 나타났는데 이를 신유물론이라고 통칭하고 있다. 신유물론은 포스트 구조주의와 구성주의가 주체의 이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물질적 조건들을 담론적 구성물로 환원하고 있다는 것에 반대하고 대신 물질에 대한 적극적인 존재론을 수립하고자 시도한다.
임지연은 현재 신유물론적 사유 혹은 객체 지향적 사유는 문학에서 동물과 식물 그리고 AI를 비롯한 SF 장르의 관심으로 확장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 문단의 상황에 주목하며, “2000년대 시가 해체된 주체를 통해 반서정을 구축하였다면, 2010년대 시는 작은 주체를 통해 일상의 서정에 관심을 두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2000년대 이후의 시는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발화법을 발명하려고 했음에도, 충분히 주체/타자의 이분법을 넘어서지는 못했다.”라고 그 한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문단의 흐름 속에서 2020년대 신유물론에 토대한 물질적 전회는 시의 창작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수의 시에서 신유물론이 제기한 비인간의 개념을 시 내부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객체인 물질의 능동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 존재론적으로 평등한 관계 맺기의 방식에 주목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김지윤은 최근 시들에 나타난 시적 양상의 변화에 관해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있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시적 사유의 경향들이 나타났고, 특정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변적인 다중주체들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는 사물의 목소리가 현상하는 발화 양상을 ‘비인칭적 사건으로서의 목소리’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시적 발화 양상이 1인칭이나 다인칭의 목소리가 아니라 비인칭적 사유에 토대하고 있음을 말하며, 새로운 비평적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
물론 신유물론을 경유한 비평적 접근에 대한 의문도 존재한다. 송현지는 “신유물론을 경유한 최근의 비평들이 인간의 저 비인간으로의 변신을 철저히 비인간 문제를 중심으로 놓고 독해하기 위해 인간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는 점”을 비판한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 주체의 중력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것은 정당한지 물으며, 신유물론적 문학론에 대한 이견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신유물론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이견들이 존재하지만, 최근 문학 장(場) 내에 신유물론적 혹은 객체 지향적 존재론의 영향이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의 평등한 상호작용에 기반한 평평한 존재론을 사유하도록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탈인간화의 장면만을 열거하거나, 단순히 인간과 비인간의 구도를 강화하는 방식이 아닌 다양한 발화 방식의 모색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2. 로라(들)
심지아는 201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뒤, 『로라의 로라』 (민음사, 2018),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 (문학과 지성, 2023)까지 두 권의 시집을 펴내었다. 시인은 첫 번째 시집 『로라와 로라』에서 해체와 재구축의 방법을 통해 단일한 주체의 언술 체계를 해체하고, 분열된 주체의 목소리가 발화하는 양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시인의 언술 체계는 대명사 주체의 언어 사용에서 벗어나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들” 다시 말해 “언어가 잊은 것들”을 드러내는 메타시의 세계를 보여준다고 평가받았다.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 중략 …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로라와 로라,
책상 위로 팔을 올리는 감정처럼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부분
시인은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의 분열하는 목소리를 들려줌으로 기성의 시적 언술 체계에 대한 거부를 보여준다. 하나에서 다섯까지 계속해 증식하는 로라(들)은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이고, 마찬가지로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존재로서 분열한다. 이렇게 로라(들)은 ‘나’와 ‘너’라는 대명사 사이의 공백에서 증식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과 해체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그 내부에 주체의 자리를 보존한다. 무수하게 분열된 목소리의 양상을 보여주는 로라(들)은 근본적으로 로라라는 주체의 흔적을 그 배후로 간직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존재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의 분열을 발견하였을 때, 그 사이의 공백은 무수한 분열의 연쇄를 가정하고 있었다. 생각하는 나를 다시 회의(懷疑)하는 나 등으로 이어지는 무수한 나라는 기표의 연쇄는 결국 신이라는 절대자를 요청으로 해서만 그 무수히 분열하는 나의 실재를 보증받게 된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의 코키토는 이미 그 내부에 이미 무수히 분열하는 나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으며, 절대적 타자의 보증을 통해 주체의 동일성을 획득하였다.
시인의 로라(들)이 처한 곤경도 마찬가지이다. 무수히 분열하는 로라(들)은 대명사 나와 너를 지시하는 대타자로서 기성의 언어 체계를 요구하고, 대명사 ‘나’의 공백을 통해서만 로라(들)은 무수히 증식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첫 시집 『로라와 로라』에서 기성의 언술 체제를 부정하고, 분열하는 로라(들)을 앞세워 기성의 언술 체계가 지니는 권위와 질서를 해체하지만 결국 자신이 부정하고 있는 로라의 공백, 다시 말해 주체라는 유령을 다시 슬그머니 뒷문으로 불러들인다.
물론 이러한 곤경은 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해체의 시도들이 있었지만,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라는 구도 아래 주체라는 유령이 다시 들러붙는 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권위적인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파편적이고 복수적인 이미지들을 구성하는 반서정의 시학은 주체라는 유령이 귀환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러한 곤경에 맞서 최근 시인들은 인간의 개념과 반대되는 비인간 객체의 목소리를 시적으로 형상화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다중주체들의 등장과 종횡하는 시적 사건과 진술들을 통해 시적 이미지 형성함으로써 기성의 단일한 주체의 목소리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비인칭 객체인 사물들의 목소리를 시 내부에서 구현하고자 시도한다. 이 시도가 성공적인지에 관한 판단은 지금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체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객체의 역능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법을 시적으로 모색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시인은 첫 시집 『로라와 로라』에서 직면한 곤경을 어떤 방식으로 벗어나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3, 물질의 주름
신유물론이 기존의 유물론과 구분되는 지점은 물질이 자기 조직적으로 생성하고 변화하는 역능을 지난다고 바라본다는 점이다. 소박한 유물론에서 물질은 인간의 인식과 언어에 포획된, 그리하여 수동성을 고유한 특성으로 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들뢰즈 이후 유물론은 수동적 물질이 아닌 자기 조직화의 역능을 지닌 물질이다. 과학적으로 양자물리학에서 분자 단위의 운동이 물질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듯이 물질은 이제 인간의 인식에 포획된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변화와 생성하는 내재적 역능을 지닌 흐름의 과정 그 자체이다.
물질은 주어진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변화 생성하며, 외부와 접속해 주름이 접히면 준안정적 체계를 형성한다. 말 그대로 준안정적이기에 물질은 언제나 변화할 잠재성을 보존한다. 이런 점에서 물질은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혹은 변화할지 모르는 창발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물이 100도에서 끓지만, 산의 정상에서 100도가 아니어도 물이 끓게 되듯이 물질은 외부와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자신을 펼쳐내는 성질은 뒤바뀌게 된다. 물질은 일견 자명한 기계적 대상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물질의 국소적 표현인 성질이 외부와 맺는 관계성을 인식할 뿐이다. 객체로서 물질은 주체의 주관적 인식으로 그 실체를 포획할 수 없으며, 다른 객체들과 관계 맺으며 발생하는 상태나 성질로부터도 자신의 실체를 감추며 물러선다. 이런 점 때문에 객체는 환원 불가능한 독자적 실체를 보존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은 단일한 주체의 관점으로 대상을 환원할 수 없는 객체의 실체성과 그것이 가진 자기 조직화의 역량을 발견함으로써 주체라는 유령이 다시 귀환할 공백을 지운다. 시인의 시 세계에 주체라는 유령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구도를 거부하고, 자기 조직적인 역능을 보존하고 자신의 잠재성을 펼쳐내는 객체라는 실체의 물질성을 시인은 파고든다.
자신의 실체를 표면 뒤로 감춘다는 점에서 객체의 폐쇄성을 시인은 “사물들이 고요하다는 것이 사물들이 아름답다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직물의 연결」)라고 표현한다. 객체가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뒤로 물러선 사태를 ‘고요’라는 시어로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객체의 폐쇄성은 관습화된 의미의 장막을 거부하는 물질의 역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고요라는 시어로 표현되는 객체의 폐쇄성은 본질적인 의미를 객체에 부여하려는 관념화된 시도를 거부하고 있으며, 오히려 국소적 표현인 성질들의 관계성으로 표현되는 객체는 주어진 환경들과 맺는 관계 양상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성질을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에서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아도 좋았다
물을 오래 바라보면 장소가 남지 않은 느낌으로
옮겨간다
기척이 없어서 공간의 죽음에 실릴 수 있었다
화물처럼
부표처럼
물속에 있는 물체의 위치는 발견되지 않는다
같은 풍경을 놓치고 있다
-「여름」전문
이 시에서 물은 깊이를 지닌 잠재적 고유 존재로서 객체이다. 우리는 언제나 물이라는 객체의 실체를 포획할 수 없다. 우리는 수면 위로 나타나는 표면만을 “화물처럼” 혹은 “부표처럼” 그 양태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물이라는 객체의 실체 내부로 들어가고자 시도하면, “물을 오래 바라보면 장소나 남지 않은 느낌”이 들거나, “물속에 있는 물체의 위치”를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다시 말하면 시에서 “장소”나 “위치”로 표현되는 객체인 물의 실체는 뒤로 물러나 있어서 주관적 인식 내부로 포획되지 않는다. 즉, 우리는 객체의 실체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객체의 실체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을 시인은 “같은 풍경을 놓치고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 표현하는 동시에, “깨끗한 삽으로 풍경을 뜨고 싶다”(「삽 깨뜨리기」)라며 풍경이라는 시어가 품고 있는 근대적 주체의 개념을 부정한다.
시인은 풍경으로 전체화거나 구조화할 수 없는 객체의 실체를 “물속에 있는 물체의 위치가 발견되지 않는다”라거나, “식물이 건드리게 되는 공기의 흔들림”(「여덟의 젤리」) 또는 “덜 녹은 아가미를 흘리고 다니는 사물들”(「겨울의 빛」)이라는 구절들로 나타낸다. 오로지 객체는 자신의 실체를 감추고 인식의 뒤로 물러나며, “발견되지 않은 물체의 위치, 공기의 흔들림, 덜 녹은 아가미의 흘림” 등과 같은 국소적 표현으로 자신의 상태와 성질을 표현할 뿐이다.
물의 표면을 엷게 저미듯이
물을 저의며 돌아오는 물고기들
전부를 덮기에는 너무 얇은 표면들
-「잉여」부분
객체의 실체는 풍경으로 포획될 수 없지만, 객체는 기계적으로 편재된 상태로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다. 객체는 “액자의 밖에서/ 액자의 안을 흐르게 하는” (「바닷가」) 흐름을 형성하는 운동성을 지닌다. 이 흐름은 안팎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운동이 아니라 시작점과 끝점을 가지지 않는 연속성으로서 관계적 운동이다.
예컨대 물이라는 객체는 “물을 저으며 돌아오는 물고기들/ 전부를 덮기에는 너무 얇은 표면들”(「잉여」)이라는 구절에 나타나듯이 물고기라는 다른 객체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개방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물은 얼마든지 다른 객체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을 수 있다. 그에 따라 자신의 성질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액체 상태에서 영점 이하의 온도에 노출되면 물은 고체로 변형되고, 구름과 관계하면 비가 되어 내린다. 그렇다면 객체의 실체를 단일한 주체의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그러한 방식은 객체의 실체를 왜곡할 뿐이다. 그렇기에 “물을 저으며 돌아오는 물고기들”로 표현되는 물과 물고기가 맺는 객체들의 관계는 그것이 가져오는 상태와 성질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객체의 실체 전부를 포획하지 못한다. 언제나 객체의 실체는 “전부를 덮기에는 너무 얇은 표면들”로만 감각될 뿐이다.
4. 언술 구조의 반복과 역량의 증식
시집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의 첫머리에 수록된 「직물들의 연결」이라는 시는 심지아 시집의 전체적 의미구조를 함축한다. 일반적으로 직물이란 씨실과 날실을 교직해 만든 면직물을 의미한다. 씨실과 날실의 교직은 일종의 운동으로서 흐름을 형성하고 그것들이 교차해 만들어 내는 주름은 항구적이지 않은 일시적인 결합이자 사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직물로 쓰일 씨실과 날실은 무엇인가? 바로 언어이다.
시인이 말하는 직물은 언어이고 연결이란 언어를 씨실과 날실로 교직해 만든 의미구조이다. 하지만 이때 씨실과 날실이 교직한 의미구조는 항구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다. 다시 말해 시 내부에 앞뒤로 이어져 교차하는 언어의 배치에 따라 그 의미구조는 다양하게 변주 가능해진다. 실제로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구도도 마치 단상들을 이어 붙여놓은 것 같이 연마다 서로 관계성을 상실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다만 전체의 시적 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직물들이 주름을 만들 듯이 반복의 형식으로 지속되는 시적 언술 구조 자체이다.
자신에게 속한 물건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자신에게 더는 속하지 않는 물건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여자는 한 번도 누구의 것인 적이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
*
사물들이 고요하다는 것이 사물들이 아름답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사물들이 고요하다는 것이 안식이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직물의 연결」부분
반복되는 언술 구조는 의미를 증식하는 동시에 의미의 규정을 지연시킨다.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문장들은 연결되어 결합하고, 이러한 결합은 주체 중심의 언술 구조를 해체한다.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인 관점에 의해 의미화되는 객체가 아니라 오히려 언술 구조를 뒤바꿈으로써 사물(테이블) 그 자체의 내재적인 역능이 드러난다. 바로 주체에 의해 의미화되는 객체로서 테이블이 아니라, 테이블 그 자체의 ‘평평함’이라는 성질이 물건들의 놓임을 견뎌내는 역능의 드러남이다.
인용을 보자. 시인은 시의 구성에 있어서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자신에게 속한 물건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와 “자신에게 더는 속하지 않는 물건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라는 두 구절을 연결해 놓았는데, 두 문장은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고 있지만 두 문장의 결합은 사건의 의미구조를 반전시킨다.
“자신에게 속한 물건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라는 구절은 행위 주체인 ‘자신’의 관점에서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것이라면, “자신에게 더는 속하지 않는 물건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라는 구절은 ‘자신’이라는 주체가 부정되고, 대신 객체인 평평함이라는 성질을 가진 테이블이 물건을 견디고 있는 사건성을 강조한다.
앞의 구절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인 관점 아래 객체를 수동적 질료로서 취급하고 인간의 관점 아래 형식을 부여한 대상이라면, 후술 되는 구절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구분이 해체되고 평평함이라는 테이블이라는 물질에 내재하는 역능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반복되는 문장들의 연결, 즉 결합은 주체가 부여한 형식에 의해 객체가 의미화되는 구조를 지연시키는 동시에 객체의 내재적 역능을 응시한다.
“여자는 한 번도 누구의 것인 적이 없었다”와 “여자는 자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라는 두 구절의 연결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같은 문장 구조를 반복하며,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는 주체성과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객체성을 교차시킨다. 시의 병립해 있는 구절들은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교차하며 복잡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시「직물들의 연결」은 같은 문장 구조의 반복과 의미의 중첩을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를 횡단함으로써 이분법적인 구분을 해체한다.
반복되는 문장 구조의 결합을 통해 시인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자아의 세계화’를 지향한다. 자아의 세계화는 단일한 주체의 관점에서 개체인 대상을 배치해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미학적 원리로 구조화되어 있다. 은유라는 형식적 기법을 매개로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서정시의 원리는 객체를 주체의 관점에서 재현한다. 덕분에 서정시의 비대해진 자아는 세계의 진리를 독점하고, 세계의 의미를 규정하는 주체의 중심성은 객체들의 존재를 왜곡하고 우열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시인은 같은 문장 구조의 반복과 연결을 통해 의미의 규정을 지연시키고, 주체를 중심으로 객체를 재현하는 서정시의 원리를 해체한다. 서정시의 주체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존재론적 우열 관계를 해체함으로써 시인은 주체의 자리를 자신의 시 세계에서 비워낸다. 이 비어있는 공백에 시인은 객체의 내재적 역량이 지닌 창발성을 가져다 놓는다. 이러한 상황을 시인은 주어와 술어라는 언술 구조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주어는 머리통처럼 날아갔다
주어에는 여닫게 되는 창문이 많았는데
술어의 불안이 자물쇠들을 푼다
… 중략 …
주어가 다 뜯게 나가면
파라솔 아래
맨 종아리들
그런 것들이 장면이라면
의미는 헐거운 단춧구멍처럼
잘 채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표정의 고양이」
시인은 “주어는 머리통처럼 날아”가 버렸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주어가 사라진 문장은 “술어의 불안이 자물쇠들을” 풀어낼 가능성이 발생한다. 문장의 주술 구조가 해체됨으로써 문장의 의미화 방향을 결정하던 주어의 결정권이 사라지고, “의미는 헐거운 단춧구멍처럼/ 잘 채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주어의 지배가 사라진 술어는 자물쇠를 풀고 다수의 잠재된 의미화의 가능성을 증식한다. 그 의미화는 “방향을 묽게 하는 방향들처럼”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획일화되거나 고정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위치를 표시할 수가 없”어서 “돌아갈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매번 다른 곳”(「책장 넘기기」)으로 미끄러진다. 획일화를 거부하고, 위치를 표시할 수 없으며, 다른 곳으로 미끄러지는 공간은 차이가 분화하고 증식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상자는 펼쳐놓은 희미한 거미줄의 리듬에 걸려 흔들리고
어떤 상자는 점점 가벼워져 잴 수 없는 무게가 되어 가고
어떤 상자는 상자에조차 비좁았지만
어떤 상자는 동작들이 잠들어 있다 그것은 상자 사진의 잠과는 다른 일이었는데
-「겨울과 겨울 아닌 일 」부분
이 차이 세계에서는 객체의 실체가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다. 예컨대 객체인 상자의 속성은 “거미줄의 리듬에 걸려 흔들리”기도 하고, “가벼워져 잴 수 없는 무게”가 되기도 하고, “상자에 조자 비좁”을 정도의 크기이며, 어떤 행위의 “동작들이 잠들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객체인 어떤 상자의 무수한 속성은 오히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대상의 잠재된 역량을 드러내고, 단일한 의미로 규정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말해준다. 객체로서 “어떤 상자”는 말 그대로 어떤(?) 상자로 남는 것이다. 객체의 실체는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의 무수한 속성들, 즉 역능이 증식할 뿐이다.
5. 읽기의 회복
앞에서 주체의 단일한 관점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객체의 물질성을 발견하고, 그것의 역능을 긍정하는 시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몸이라는 물질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힘에 대해서도 섬세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몸은 물질이다. 몸이라는 물질도 객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외부의 환경에 따라 그것의 성질을 드러내는 방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일상의 감각이란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장막(帳幕)처럼 우리의 피부를 덮고 있는 반복된 습관과 제도적 관습의 산물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것도 싸여 있지 않을 때/ 피부는 가장 예의 있게 보인다.”(「모국어는 끝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을 감싸고 있는 관습화된 의미들은 주체로서 우리를 호명하고, 몸의 역량을 착취한다. 이 과정에서 들뢰즈가 말했듯 우리는 점차 반복되는 일상에 소진(小盡)된다. 소진은 말 그대로 우리의 역량을 완전히 소비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오히려 완전한 소진은 달리 말하면 단절이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의 몸을 포획함으로써 반복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회사에게 완전히 자신의 역량을 소진함으로써 드디어 기성의 삶과 단절(회사의 퇴사)하는 것이다. 이런 단절 속에서만 우리는 자기 감각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시를 읽는 행위는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교란하고 다시 재구성하게 하는 힘이다. 왜냐하면 시는 언어 바깥의 미시 감각을 포획하는 언어 예술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해변에는
실눈처럼 가늘어진
새들,
어떤 목소리는 졸린 목소리 같아서
따라가고야 만다
-「읽기의 회복」부분
읽기에 관해 시인은 “해변에는// 실눈처럼 가늘어진// 새들,// 어떤 목소리는 졸린 목소리 같아서// 따라가고야 만다.”(「읽기의 회복」)라고 말한다. 시인에게 진정한 읽기란 해변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졸린 목소리를 따라가는 행위이다. 여기서 졸린 목소리는 무엇인가? 바로 의미화 바깥으로 벗어나는 발화의 가능성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대상을 환원하는 주체 중심의 의미화에 대한 거부의 태도로 읽을 수도 있겠다.
아도르노가 말했듯 세이렌의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선박의 기둥에 몸을 묶는 오디세우스의 행위는 외부를 허락하지 않는 이성 중심주의를 상징한다. 반면 시인은 해변에서 들려오는 졸린 목소리를 따라가는 일이 읽기의 회복이라고 말한다. 졸린 목소리는 이성의 배후에 침입한 세이렌의 목소리이다. 이 목소리는 기성의 이성적 언어로는 포획할 수 없는 언어 바깥의 실재에 가닿는다. 이 언어의 바깥은 우리가 상실한 미시 감각들이 우글거리는 잠재적 차원으로 시인에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장소들”(「네가 밤을 사랑하듯이」)이며, 그 장소에서는 “문 없는 단어들처럼/ 가득하고 고요하게 증발하는 낙서처럼”(「눈사람」) 현행화되지 않은 미결정된 흐름으로서 물질의 미/분화 운동이 존재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시인의 시를 통해 읽기의 회복에 이르렀다. 주체라는 유령이 뒷문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반복의 언술 체제를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를 횡단하고, 주체가 없이도 증식하는 객체의 내재적 역능을 발견함으로써 일상의 감각을 교란하는 읽기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시적 방법론과 태도는 첫 시집 『로라와 로라』의 세계를 다시 반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적 세계로의 진입을 보여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