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현론, <줄리아나 도쿄> 와 <소녀 연예인 이보나>를 중심으로
1. 몫 없는 자들
문학은 비평의 언어를 벗어나는 자리에 있다. 그리고 비평은 문학에 관한 자신의 언어가 언제나 어긋난다는 것을 수긍하는 일이다. 이러한 어긋남을 통해서만 비평과 문학 작품은 단순한 이론적 형식적 언어적 결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긴밀한 상상적 만남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비평이란 비극적 희극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반복되는 끝없는 읽기의 실패 속에서 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비평이란 작품이 쓰이기 이전까지 침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특성상 사후적이다. 마치 헤겔이 말한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일이 끝난 황혼에야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다. 다시 말해 비평적 사유는 앞서 펼쳐진 것들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비평의 운명은 실패를 예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학은 정립된 비평적 사유들에 반(反)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평을 쓴다는 것은 예정된 실패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라는 점에서 행복한 불행의 표정을 바라보는 일이다.
근본적으로 문학은 상실의 역사이며 익숙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는 일이다. 즉 일상의 자연과 사회 속에서 은폐되어 망각했던 존재들의 함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 (1850)는 일상의 악과 상실된 신의 세계를,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1851)은 사라진 모험과 자연의 세계를,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1925)과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1928)은 사라진 사랑과 관능의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1922)와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1929)에 이르면 인간은 자기의 내면마저 상실하고 만다.
이처럼 끝없이 회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실의 역사가 문학사이고, 문학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상실되어 가는 것들,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자기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들에 목소리를 되돌려준다. 이런 점에서 문학은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역사 속에 되돌려주는 일이며 이것이 문학의 정치성을 형성한다. (자크 랑시에르)
최근 한국 문단의 동향이라고 한다면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주목이다. 과거부터 페미니즘 문학과 비평은 존재해왔지만 최근에 이르러서야 여성 주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한국 사회가 다변화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회 내부에서 몫이 없는 자로 존재했던 여성에 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1990-2000년대까지 문단이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심도 있는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고 문학에 대한 기존의 기준과 정의에 맞춰 현재 페미니즘 문학을 바라보는 방식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결국 앞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의 페미니즘 비평과 문학이 과거와 무엇이 다른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1990년대 김선우의 모성과 신체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2000년대 박민정이 보여줬던 모성 부정의 세계에서 나아가, 2010년대 후반 이소호의 시세계에 이르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젠더 갈등뿐만 아니라 여성 주체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까지 확대되며 그 양상이 복수화된다. 즉 모성화된 여성 신체, 아버지의 폭력을 수용하는 어머니에 대한 부정, 무의식의 히스테리한 세계에서 넘어서 여성 주체들 사이의 갈등, 사회에서 실패한 남성과 소수자를 아우르는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한정현의 소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한정현 소설의 미학이 2000년대 페미니즘 문학과 변화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2. 희미한 관계와 분명한 책임감
소설 《줄리아나 도쿄》 (2019)는 일본 도쿄라는 이국(異國)의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데이트 폭력에 의한 외상으로 한국어를 상실한 여주인공 한주가 게이인 유키노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한국을 떠나 일본에 살던 한주는 과거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주는 유키노의 배려로 함께 같은 집에서 동거하거 하게 되고 점차 상처받고 닫혔던 마음을 치유해간다.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던 한주와 유키노가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은 유키노의 연인 한수가 그들을 찾아오면서 부터이다. 한주와 유키노의 관계를 오해한 한수의 질투로 유키노는 한주의 곁을 떠나게 되고, 유키노가 말도 없이 사라지자 그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경찰서에서는 예상치 못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경찰은 삼십여 년을 한국에서 살았던 한주가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아해했다. 그녀는 경찰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엉뚱한 의문을 가진 것도 아닌데, 마치 그들로부터 도망이라도 칠 것처럼 어느새 주먹을 꽉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쯤에서 뒤돌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유키노를 찾아야 했다. 아니, 적어도 그가 위험하다는 것만은 경찰에게 꼭 알려야 했다. … 중략 … 정작 난처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한주는 실종인과의 관계를 기입하는 칸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가족이라고 써넣었다가 줄을 몇 번 그어 지웠다. 종이를 한 장 더 달라고 했다.
동거인.
손에 힘을 주어 그렇게 적었다. 부동산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이 단어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한주는 유키노와 함께한 시간이 남들의 눈엔 아무것도 아닐 만큼 허술하게 보일 것임을 알았다. -《줄리아나 도쿄》, 76-77면
한정현의 소설에서 관계와 책임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씨줄과 날줄이다. 유키노의 실종신고를 위해 한주가 작성한 실종신고서에서 둘의 관계를 동거인이라고 적는다. 한주가 적은 것처럼 둘의 관계는 현실적으로 동거인 이상의 관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주는 유키노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실종을 경찰에게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이러한 책임감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한주가 느끼는 책임감은 자신도 모르게 유키노의 삶에 개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둘이 같은 집에 거주한 사실은 단순한 동거가 아니라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연대 행위이다. 폭력의 외상으로 외국어증후군을 앓고 세상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은 여성과 세상의 폭력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한 게이 남성 사이의 연대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의 관점을 벗어난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은 그 사이에 실재하는 많은 존재들을 누락시키거나 배제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유키노라는 존재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며 한수라는 연인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고는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키노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인 성차의 개념으로는 포획할 수 없는 대상이다. 정신적인 외상을 지닌 한주가 소수자 남성인 유키노를 한수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월급을 몰래 한수에게 쥐어주는 장면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대립적인 것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환대의 의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정현의 소설들은 여성 주체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주변에 머물러있는 타자들과의 보이지 않는 연대를 발견한다. 한주가 유키노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처럼 주체를 둘러싼 타자의 관계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각각의 개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무위의 공동체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분리된 개개의 존재들의 기억에 다가갈수록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연결된 어떤 희미한 공동체이다.
3. 역사를 다시 쓰기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정현의 소설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여성과 퀴어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 겪어왔던 투쟁 역사를 연결시킨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과 소수자들은 각각 개인적 경험의 양상이 다르지만 사회로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빼앗긴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떠한 필연적인 관련성을 찾기 힘든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 만나고는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외면하지 못하고 연대의 의지를 품는다. 이때 의지란 어떤 이념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타자가 받은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윤리에 근거한다.
소설 《줄리아나 도쿄》 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물들이 지닌 고유한 삶의 이력과 고통이다. 인물들은 타자에게 고백하기를 욕망한다. 고백은 누군가에게 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이해받기 바라는 욕망을 전제한다. 그리고 곧 우리는 인물들의 고백이 특수한 개인의 경험을 누설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역사에서 누락된 경험들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한 개인의 특수한 체험의 토대에 가로놓인 시대적 구조와 한계를 고백의 형식을 통해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는 보편적 이성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그렇기에 역사는 헤게모니를 지닌 승리자이자 지배집단의 관점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젠더, 인종, 계급 등의 다양한 요소들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요소들은 누락되기 마련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의 대부분은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전쟁사이며 여성과 소수자들의 역사는 배제되거나 누락된다. 반면 문학은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것으로, 누락되고 소외된 것, 억압되어 배제된 존재들을 귀환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한정현의 소설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고백을 통해 보편적인 역사에서 망각되거나 누락된 여성과 소수자들의 역사를 복원하려고 시도한다. 예컨대 유키노의 어머니가 단지 몸을 팔아서 목숨을 연명한다는 이유로 음악을 듣고 공부하는 것조차 금지 당하고 미군 남성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이나, 여성노동자들이 고된 노동과 형편없는 저임금에 저항해 알몸으로 거리를 나섰던 시도들이 역사에서 사진 한 장 남지 않고 누락되었음을 언급하는 장면들이다.
“한주 씨,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러 소리를 내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살려달라는 말을 적어도 그 미군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내고 싶었던 소리는 웃음이 되어 터져나왔다. 미군은 머리까지 젖혀가며 웃는 그녀를 보더니 술병의 의자를 던져 부쉈다.
“가장 먼저 부서진 건 저였을 것입니다만.”
그녀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캬바쿠라와 클럽은 이제껏 한주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세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주는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에 제일 먼저 없어지는 건 소리’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녀가 공부했던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여성노동자들은 온몸을 던져 말하려 했다.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 작업복을 벗어버리고서.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녀들은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만다. 겨우 낸 목소리가 또다른 폭력으로 사라졌다는 뜻이다. 열악한 노동 환경과 형편없는 저임금에 항의하며 알몸으로 거리에 나섰던 여성들의 그 시위는 사진으로조차 남지 않았다.
- 《줄리아나 도쿄》, 93-94면.
이런 점에서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와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2020)에 등장하는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대체로 지식인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소설에는 유학생이거나, 대학원 석사, 비평가 혹은 연구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삶을 관찰해 자기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를 도출해낸다. 위의 인용에서 대학원 석사 출신인 한주가 유키노의 어머니의 고백을 들으며 여성노동자의 역사를 떠올리고 누락된 폭력의 역사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한정현의 소설을 읽으며 여성들을 향한 폭력이 국적과 시대와 상관없이 벌어졌다는 것, 정당한 저항의 요구조차 사진 한 장 남기지 않는 배제시키는 사회의 무자비한 폭력의 공포를 이해하게 된다.
소설 《줄리아나 도쿄》는 모국어를 상실하고 외국어증후군을 앓는 한주와 소수자인 유키노 그리고 연구자 김추의 이야기를 각장으로 분리해 배치하였다. 세 인물의 이야기를 각장으로 분리하고 서로의 사연이 각자의 관점에서 교차되며 전개되도록 함으로써 주체들의 발화가 단일한 초점 화자에 의해 동일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예컨대 한주가 데이트 폭력에 의해 얻은 내면적 상처를 유키노와 만남으로써 치유하는 과정, 한수와 사랑에 빠졌던 유키노가 그의 폭력 때문에 헤어져 지내다가 한주를 보호하기 위해 한수와 부산으로 떠나가야 했던 사정, 줄리아나 도쿄의 사회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던 연구자 김추가 유키노의 단서를 쫓던 한주를 만나는 과정까지 세 남녀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전개되도록 구성하고 있다. 이 같은 구성은 한주와 유키노 그리고 김추가 서로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작품을 입체적으로 읽히게 한다.
기성의 사실주의 소설들이 단일한 초점 화자의 목소리에 의해 사건이 발화되도록 구성함으로써 단일하고 통일성이 있는 느낌을 준다면, 한정현의 소설들은 각각의 사연을 지닌 개별적인 화자들의 목소리가 서로 교차되도록 구성함으로써 인물들이 고유성을 잃지 않게 하고 있다. 작가는 개별 주체들의 발화를 존중하고 한 편의 소설 속에 여러 주체들의 발화를 복수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결코 단일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재현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끝이 없는 연결의 과정은 하나의 목소리로 통일할 수 없고 동일화 할 수 없는 네트워크를 통해 확장됨으로써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허문다.
4.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아는 주체
지속적으로 언급하듯이 한정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게이, 트랜스젠더, 여성, 전공투, 노동자까지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된 주변인물들이다. 국가와 사회는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질서와 무질서를 구별한다. 그리고 사회적 질서를 교란하는 대상을 추한 것, 의미 없는 것, 무질서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기성의 질서를 공고히 한다. 한정현의 소설집 표제작인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서는 질서의 외부로 배제된 소수자들을 규정짓는 사회의 무의식적인 폭력의 시선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소설의 주인공 주희의 양아들이자 트랜스젠더인 제인이 서울대 정문에서 총을 맞고 죽은 날 제인의 죽음을 미디어에서는 “여장 남자 서울대생 시위 도중 사망”이라는 자막을 내보내며 기삿거리로 다룬다. 한 인간이 시위 현장에서 서 있다가 억울하게 총을 맞아서 죽었다는 사실보다, 제인이 여장 남자라는 사실이 그의 죽음을 사람들의 가십거리로 만든다. 사건이 벌어진 경위와 한 사람의 충격적인 죽음보다 기사의 자막에 적힌 여장 남자라는 사실이 대중들의 이목을 끈다.
제인, 좋아함은 무엇이야? 나는 그걸 제인에게 끝내 묻지 못했다. 제인은 서울대 정문에서 총을 맞고 죽은 그날, 나는 지명수배가 내려졌던 버스 구석에 앉아 광화문을 지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 있는 경찰을 보고 고개를 파묻으려 할 때였다. 문득 대형 전광판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아주 조금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제인의 얼굴이 왜? 구체적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커다란 자막에 눈에 들어왔다. “여장 남자 서울대생 시위 도중 사망”.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요, 제인은 시위 안 해요. 그 어떤 비난에도 제인은 시위에 나간 적이 없었다. 그것은 주희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제인은 그저 나와 너를 사상과 이념으로 나누는 것에 별 흥미가 없다고 했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 80면.
기사의 자막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사회는 성찰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제인의 본질보다 그가 여장 남자라는 겉모습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기사의 자막은 사회의 소수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과 무의식을 대변한다. 즉 사회는 소수자들이 정당하게 지녀야 할 목소리를 앗아감으로써 사회 내부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사회 질서를 교란한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권리와 목소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정현의 소설은 세상의 은폐된 폭력에 의해 부서지고 망가져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타자들에 관심을 보인다. 사회적 타자로서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기를 강요받거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사회는 용인하지 않는다. 서울대 정문에서 총을 맞아 죽은 제인의 죽음이 한 줄의 가십성 기사로 무의미하게 연기처럼 사라지듯이 말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에 대해 괴로워하고 책임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지라도 제인의 죽음을 기어코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소설 <오늘의 일기예보>에 등장하는 서술자인 나의 고모와 같은 경우이다. 고모와 제인은 친구 사이다. 나는 고모의 집에 놀러온 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시위 현장에서 총을 맞아 죽은 제인의 소식을 들은 고모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왜 고모는 제인에게 용서해 달라고 했을까.
할머니가 죽기 전까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고모가 제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야? 용서를 구할 사람들은 시위대에 총을 쏜 사람들이잖아, 심지어 시위도 않고 횡단보도에 서 있던 제인에게 총을 쏜 그 사람들이잖아. 사람을 죽여 놓고 여장 남자라느니 불우한 어린 시절이 만든 불행이라니 하며 제인의 죽음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말을 하던 그 사람들이잖아. 그리고 고모를 이렇게 만든 …… 아니, 나는 속엣말로도 그 말은 늘 하지 않았다. 이렇게, 라니. 나는 가끔 나를 불쌍하게 만드는 건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장 남자라는 말을 제인에게 붙이기 전까지 우리에게 제인은 그냥 제인이었다. 그러니 내가 저 말을 내뱉는 순간 고모가 이렇게든 저렇게든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고모가 제인에게 용서를 구한 건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가 죽고 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늘의 일기예보>, 111면.
서술자인 ‘나’의 질문처럼 왜 고모는 제인에게 용서를 빌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임이란 무엇인지 이해하여야 한다. 서영채는 《죄의식과 부끄러움》 (2017)에서 “주체의 자기 구성에서 중요한 것이 책임의 영역을 찾아내고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의지”이며, “주체로서 한 사람의 고유성은, 궤도 이탈의 결과로 생긴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어떻게 메우려 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쉽게 말해 한 인간이 신이 정해준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자동인형이 아니라 진정한 주체로 구성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위반의 죄의식과 윤리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 때문에 느끼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자각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고모가 제인의 죽음에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녀가 제인의 죽음을 타자에게 일어난 우연한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모가 한강에서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는 행위는 제인의 억울한 죽음에 과거 자신의 무관심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죄책감 그리고 제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근거한다. 타자를 향한 국가의 폭력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제인의 죽음과 같은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윤리의식 때문에 고모는 제인에게 용서를 빌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주인공 나는 모두가 망각한 제인의 죽음을 기어코 기억함으로써 그리고 고모의 사랑과 슬픔에 공감하며 오늘을 여전히 살아간다. 여전히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존재하는 세상에서 소리 없는 작은 지지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시위대가 있대요, 택시를 타고 마찬가지예요.” 누가 옆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건가 싶어서 보았더니 어떤 여성이 누군가와 다급하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 여성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쪽 팔을 뻗어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남동 가려면 강변북로밖에 없을 것 같은데 지금 다 그쪽으로 몰렸을 거예요. 어쩔 수 없어요. 주말엔 사위가 있잖아요.” 멀리서 택시 한 대가 유턴하는 것이 보였고 어느새 나까지 아휴 다행이네, 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니,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욕할수만은 없죠. 정말 슬퍼서 나온 사람도 있어요.”
-<오늘의 일기예보>, 113면.
5. 사소한 사랑의 세계
우리 일상은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잡담의 세계이다. 무의미한 말들과 비본래적인 것들로 가득한 세인(世人)들의 세계이다. 비본래적인 세계는 일견 무의미하게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형성한 공동의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동의 세계에서 자기 삶의 방식들을 형성하고 어쩔 수 없이 타자들에게 노출되어 우리 삶은 경계에 선다. 타자란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세계를 간직한 존재들이며 안일하게 정주하고 있는 나의 세계를 부수며 도래하는 자이기도 하다.
한 시인이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김수영, 「사랑」) 라고 적었을 때 그가 보았던 사랑이란 나의 세계를 부수는 타자의 도래였을 것이다. 이 같은 타자의 도래를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의 말처럼 타자의 도래로 인해 나의 세계가 부서지는 일이 사랑이면, 그래서 나 자신이 구축한 세계의 불완전성을 수용하는 일이 사랑이라면, 나의 닫힌 세계를 부수고 도래할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은 사소한 사랑의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서가 말하려던 거요. 사랑인가 혁명인가, 가 아니고.
나는 그때까지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도 허공에 멈춰 선 그의 손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사랑과 혁명이었을 수도 있을 텐데.
그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제야 그의 손을 깜싸듯 맞잡았다. 내 손을 맞잡으며 그가 조금은 힘을 주어 말했다.
한서는 한 사람을 사랑해 보았으니까. 그래서 모두를 위한 혁명을 말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오늘의 일기예보>, 112면.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소한 일이 모두를 위한 혁명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을 할 줄 아는 자만이 사랑의 대상에 대해 사유하며, 모든 앎이 종말을 고하는 곳에서 사유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너로 인해 사랑을 배웠다는 시의 구절처럼 우리는 타자로 인해 내 안의 경계가 부서지는 혁명을 배우게 된다. 한 개인의 문제가 우리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 몫 없는 자들을 향한 폭력이 우리의 안정적인 삶의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유하고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다. 마치 한정현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삶의 민낯이 우리의 매끈한 일상적 삶의 중심에 타자의 얼굴을 도래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소한 사랑의 방식들을 일상 속에서 발명해야 한다. 나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타자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토록 사소한 혁명이 새로운 공동의 세계를 도래하게 한다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