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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부르크의 최중원 Apr 27. 2021

(불)참

가족 모임에 언제나 늦는 것은 막내였다.


보통은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들어와서는 어머니가 따로 챙겨둔 음식을 먹는 식이었다. 아버지의 미덥잖은 눈빛이 자신을 향하면 막내는, 자신도 제시간에 오고 싶었다고, 요즘 시간 맞춰서 퇴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아냐고 투덜거렸다. 그럴 거면 지 누나처럼 선생님이 되지 그랬니, 아니면 지 형처럼 공무원이나 되던가. 그러게 이야기는 왜 쓰겠다고 해서. 어머니가 따로 덜어두었던 음식을 데워 오면서 눈을 흘겼다. 다음 차례는 막내의 형과 막내의 누나가 서로, 자신의 직업도 만만치 않다고, 재수 없는 교무부장이며 어제 동사무소에 와서 진상을 피우고 간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다. 레퍼토리는 철 지난 시트콤이 재방영되기라도 하듯이 매번 똑같았다. 


그리 살뜰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 가족은 일 년에 너 댓 번가량 만났다.  설날에 한번, 추석에 한번,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일에 각각 한번. 그리고 꼭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더 만나야 할 일이 생겼다. 좋은 일일 때도 있었고, 나쁜 일일 때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은 가족 구성원들은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모여 앉았다.  


"이번에도 막내는 제시간에 오지 않을 건가 봐" 막내의 누나 D가 말했다. 임신 6개월째인 D는 배가 이제 꽤나 나와있었다.  작년에 무역회사의 사원과 결혼한 D는 중학교의 사회 선생님이다. 

"뭘 새삼스럽게. 승현 자꾸 돌아다니지 말고 이리 와서 좀 가만히 앉아있어!" 막내의 형인 C가 말했다. 승현은 C의 여섯 살짜리 아들이다. C는 영어 학원 수업이 막 끝난 승현을 데리고  모임에 참석했다. 원래는 C의 아내가 승현을 데리고 집에 가기로 되어있었으나 아내에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는 바람에 C가 승현을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듣기에는 좀 껄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가는 자리일 수도 있겠다고 C는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고작 여섯 살이니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식당의 좁은 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승현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손을 쳐들었다 내렸다. 

"벗 아임 헝그리. 하우 롱 슏 위 웨이트 언틸 푸드 이스 커밍"

"우리 승현이 영어 잘하는 것 좀 봐, 할머니가 깜짝 놀랐네" 하고 막내의 어머니인 A가 과장된 포즈로 박수를 쳤다. 

"리 얼 리?"  승현이 A에게 달려와서 와락 안기는 것을 보며 막내의 아버지인 B는 왠지 모를 못마땅함을 느꼈다. 영어가 아무리 출세에 좋다지만, 초등학교도 다니기 시작하지 않은 아이에게 벌써 영어 교육이라니. 저놈이 양키 코쟁이도 아니고, 한국 애는 한국어를 먼저 잘해야지.... B는 오늘의 모임 자리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파스타보다는 잔치국수가, 피자보다는 부침개가 그는 더 좋았다. 하지만 이 가족들이 무엇이든 그의 의사를 반영해서 하는 경우가 있던가. 하지만 오늘이야 말로, 땅에 떨어진 가장의 권위를 드높이 세워야 하는 날이다.


B는 헛기침으로 목을 다듬은 다음에 말을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얼마 전 중종의 큰 어르신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당신이 가지신 땅의 일부를, 반값에 파셨다."

"파파, 왓 이스 중종?" 승현이 A의 품에  안긴 채로 C에게 물었다.

"그게, 좀 컴플리케이디트 투 익스플레인 일단 리슨" C는 검지 손가락을 펴서 입술에 가져다 댔다. 

B는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꽤 넓은 땅이야. 지금은 먼 친척이 땅을 빌려서 고구마 농사니 아로니아 농사니 하고 있지만."

"파파, 이스 아로니아 딜리셔스?" 승현이 다시 끼어들었지만, B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 무슨 과세 구조가 개편되는 바람에, 내가 계속 가지고 있다면 세금 폭탄을 맞게 생겼다. 올해가 가기 전까지 나는 이 땅을 상속시킬 생각이다." 

"아빠, 세금 매기는 기준이 달라지는 건 나도 알겠는데, 엄마 아빠 응봉동 집 말고 부동산이나 땅이 더 있어? 아파트 한 채에 농지 몇 마지기 가지고 있다고 그게 그렇게 오를 거 같지는 않은데."  D는 한때 상가 투자에 관심이 있었다. 몇 달 동안 인터넷 강의를 듣고, 투자 좀 한다는 교대 선배를 따라 여기저기 답사를 다니면서 부동산 투자에 대한 감이 좀 서 있는 상태였다. 

"몇 마지기 정도가 아니야. 그 땅이 꽤 크다고. 그리고..."

 B는 주변을 살피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청난 투자 호재가 있다고"


"음식 나왔습니다." 그 순간, 종업원이 음식이 이층으로 실린 카트를 밀고 다가와서 말했다.

B는 난데없는 종업원의 출현에 깜짝 놀랐지만,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일단 좀 먹자고" 

투움바 파스타며 오지 치즈 프라이며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는 종업원을 유심히 살펴보던 승현이 물었다.

" 아 유 베티?"

종업원의 가슴에는 BETTY라고 적힌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 네, 손님. 베티입니다."  종업원은 무릎을 꿇고 앉아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곤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 라이크 유"  승현의 말투는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마치 명령문처럼 들렸다.

"어멋" 뜬금없는 고백에 종업원이 당황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승현아,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애정표현 막 하는 거 아니야. " C가 당황하며 승현을 타일렀다. 

"우리 승현이, 참 사랑이 많아. 누굴 닮아서 그런지, 그렇지 오빠?" D가 말했다.

C는 D의 말에서 자신을 향한 비난을 느꼈다. "너, 말투가 좀 이상하다?"  

"내 말투가 이상해? 난 예전이랑 똑같은 말툰데? 그냥, 새언니 생각이 갑자기 나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말해" 

"정말? 승현이 있는데도?"

"너...?!"

테이블의 분위기가 갑작스럽게 싸해졌다. A와 B는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맛있는 식사되세요!"  접대 매뉴얼에 별표 표시와 함께 필수라고 적혀있는 마지막 인사를 할 타이밍을 노리던 종업원은

잠깐의 침묵을 놓치지 않고, 인사를 한 뒤에 빈 카트를 끌고 자리를 떴다.

"본 에피팃"  아이용 플라스틱 수저와 포크를 한 손에 하나씩 챙겨 들고, 승현이 말했다.





B는 이 불편한 침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D는 분명히 자신의 오빠 C를 비난하고 있었다. C가 바람이라도 피우고 있는 것일까? 

그 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따져봐야 할 것이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아니다.  오늘 이 자리의 화제는 내가 주도해야 한다. 사람들이 조용히 음식을 나눠서 먹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B는 다시 말을 꺼내기로 했다.

"먹으면서 들어 들. 내가 중종의 어르신에게 받은 땅, 바로 옆에 큰 도로가 들어설 거야. 그게 다가 아니야. 이번에 새로 군수 된 양반이, 군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하려는 의지가 아주 큰 사람이라고.  지금 너희들, 시골의 밭 몇 마지기가 해봤자 얼마나 할 거냐고 생각하고 있겠지만은, 놀라지 말아. 그 땅 근처에 테마 파크가 들어설 거라고."

"테마파크요?"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A가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내가 말을 안 했었나?" 하고 B는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A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B의 고의였다. A와 친한 언니 중에, 부동산 투자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었다.  B가 A에게 고향 땅 근처에 엄청난 투자 호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그 정보는 곧바로 그 언니에게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발품을 팔아서 개발 계획을 담당하는 공무원인 먼 팔촌에게 들은 정보였다.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적어야 좀이라도 돈을 더 벌 수 있음은 자명했다. 

"테마파크? 디즈니 랜드가 한국에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그거는 아니겠죠."

말없이 밥을 먹던 D가 물었다.  그리곤 B의 표정을 바라본 다음에 눈이 휘둥그래 해졌다. "헐 대박. 진짜?"

"디즈니?" 아빠의 품에 안겨 물에 헹궈서 매운맛을 뺀 투움바 파스타를 먹고 있던 승현의 눈도 함께 휘둥그래 해졌다.

"승현아, 제발... 렛 잇 고는 이제 그만 부르자..." C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승현을 타일렀다. 얼음왕국 유행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승현은 얼음왕국 생각만 나면 그 노래를 불렀다. 

"아빠, 정말 디즈니 랜드가 들어온다고요?" D가 책상에 한쪽 팔꿈치를 기대고 몸을 B 쪽으로 기울였다. 

"아빠 고향에? KTX도 다니지 않고 고속도로 타려면 한 시간 넘게 국도 달려야 하는 그곳에 디즈니 랜드가?"

"32번 국도  이제 직선화 되어서 삼십 분이면 가!" 욱 하는 마음에 B가 C에게 쏘아붙였다. 

"왜 하필 거기에?  서울이랑도 너무 멀고... 위치 좋은 데도 많을 텐데..." C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확실하다고 그랬어. 이제 싸인만 하면 모든 게 다 결정이래. 얼마 전에 미국에서 임원들이 와서 부지도 보고 갔다고 했다고." 

B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근 처에 디즈니 랜드가 들어설 땅을 상속해 줄 생각이다. 그래서, 문제는 이 땅을 누구에게..."


갑자기 승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 밖 복도로 나가서는 빙글빙글 돌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렛잇고~ 렛 잇 고~"

"승현아 아 진짜 언제까지 그 노래 부를 거니.. 얼음왕국 2가 나온지도 벌써 이년이야..."

C는 한숨을 푹푹 쉬며 승현을 따라 자리 밖으로 나와서 승현을 안아 올렸다. 레스토랑에 앉아서 저녁을 먹던 다른 손님들이 킥킥 거리며 승현을 귀엽게 쳐다봤다. 


 B는 슬슬 짜증이 솟구쳤다. 도대체가 이야기의 흐름이 탁탁 끊기고 있잖아. 이런 중요한 자리에 애는 왜 데리고 나와가지고. 막내는 대체 언제 오는 거야?  B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내 A에게 막내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말하려다가, A의 손이 핸드폰 스크린 위의 키보드를 바쁘게 오가는 것을 보았다. 

"당신 지금, 언니에게 카톡 하는 거야?"

"당연하죠. 이런 좋은 정보를 혼자서 알면 아깝잖아요."

"제정신이야? " B는 황당한 눈으로 A를 바라봤다. 

"이거 완전 극비 정보라고. 세상에서 아는 사람 그 공무원과 나 딱 두 명밖에 없는 거라고. 비밀 엄수가 생명이야. 알면 알 수록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라붙어서 엉망이 될 거라는 거 몰라?" 

"언니한테만 말할게요. 이번에 우리 친목회 회장 당선되는데 언니가 많이 도와줬단 말이에요. 아니 그리고, 무슨 그 정보가 두 명밖에 모르는 거겠어요? 벌써 나, 우리 딸, 아들, 손자, 응? 그리고 여기 예쁜 아가씨까지 다섯 명은 더 알게 되었는데!"

아가씨라니. B가 고개를 돌려보니, 음식을 서빙했던 베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음식이 괜찮은지 여쭤보려고요.."

"아가씨, 음, 그, 뭐 들은 거 있어요?" B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종업원은 양손을 크게 휘저었다. " 아니요 아니요, 하나도 못 들었어요. 투자할 돈도 없고요. 아 그럼, 마저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는 후다닥 뛰어서 매장의 다른 쪽으로 향했다.





 이놈의 집구석은 대체... B는 생각했다. 아내는 허구한 날 등산에 티타임 모임에 꽃꽂이 모임에 집에서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고, 첫째 C는 그렇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라테스인지 뭔지 하는 강사랑 결혼을 하더니 이제는 한 눈이나 파는 모양이고. 사람 고르는 눈 없는 것은 D도 마찬가지다. D의 남편을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B는 아직도 뒷골이 당겼다. 어깨를 넘는 긴 머리에, 너덜너덜한 회색 티셔츠에, 무릎에 난 구멍 사이로 앙상한 무르팍이 다 보이는 청바지를 입은 웬 놈팡이 같은 놈이 자신의 집 앞에서 D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하던 밴드를 그만두고 머리를 자르더니 사람 같은 모양새가 되어 취업에 성공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미 커리어의 출발이 한참 늦은 뒤였다.  


B는 곧이어 막내인 E를 떠올렸다. 둘째와 여섯 살 터울의 늦둥이인 E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례가 많았다. 기흉으로 군대 면제를 받은 이년의 시간 동안 각본을 써서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서든 말렸어야 했는데.  그 뒤로 몇 년 동안, E가 쓴 각본은 한 번도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고, E는 이런저런 직책을 맡아 촬영 현장 일을 하면서 아직도 틈이 날 때마다 각본을 고치고 투자사에 보내는 일을 반복하는 듯했다.

B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고생스럽게 영화판에 머무는 E가, 남에게 번듯한 직업으로 소개할 수도 없는 자신의 막내가  꼴도 보기 싫을 때가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자꾸 신경이 더 쓰였다. E가 한참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였을 때 자신이 무려 오 년 동안이나 터키의 건설 현장에 파견을 나가 있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아빠, 그래서 그 땅을 어떻게 하시게요. 저희에게 상속하시겠다구요?" D가 B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한테요? 공동명의로?" C가 껴들었다.

처음에 말을 꺼낼 때는 귓등으로 흘려 넘기더니,  이제 와서 관심은 무슨 하고 생각하며 B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관심 없어 보이던데 뭘 그러냐. "

"에이 아빠, 관심 없다뇨, 승현이가 자꾸 껴드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지 뭐예요." 

"오빠, 승현이 핑계 대지 말라구. 승현아 핑계가 뭐니 영어로?"

"익스큐즈. 노 익스큐즈!"

"너야말로 울 아빠 고향 완전 무시했으면서 갑자기 웬 관심 있는 척이야. 응?"

다시 다투기 시작한 아들 딸들을 보며 B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B는 마음 같아서는 아무에게도 땅을 주고 싶지 않았다. 종합부동산세의 과세표준이 갑자기 이렇게 내려가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미쳤다고 왜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당에 표를 주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B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당신, 그런데 그 땅을 지금 애들 주겠다구요?" A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 어쩔 수 없어. 땅을 안 팔면 내년에 세금 폭탄을 맞는다구."

"종부세 말이에요?"

"그래."

"과세 표준이 얼마로 내렸는데요?"

A가 "과세 표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B는 처음 보았다. B가 알기로 A는  지금까지 세금이며 부동산이며 재산을 유지 증식하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성가신 것에 대해 신경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활비 지출 계획을 수립하고 지출을 실행하고 계획을 보완하는 일은 A의 담당이었으나,  투자를 하는 일은 온전히 B의 담당이었다. 물론 A는 B가 어디다 얼마나 투자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고, B도 기회가 될 때마다 충실하게 A에게 투자 상황을 알려줬다. 수익이 났을 때는 조금 부풀려서 말하고, 손실이 났을 때에는 손실액을 줄여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아빠, 과세표준이 영어로 뭐야?"

드디어 오늘 승현이 한국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B는 A에게 현재의 과세 표준을 간단히 알려줬다.

"계산이 안 맞는데...?" A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가진 부동산이, 종부세의 과세 기준을 넘어서질 않아요."

A의 말에 B는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아냐, 우리 종부세 대상이야. 당신이 계산을 뭔가 잘못했나 보지."

"아니. 언니가 알려줬거든.  우리가 가진 부동산의 가치를 대략 다 합해봐도, 종부세 과세 기준을 초과하지는 않아. 일억 이 삼천 정도가 모자란데"

"그럴 리가. 아니야. 내가 잘 계산해 봤다고"

갑자기 A가 무엇인가가 떠올랐다는 듯 벌떡 일어나서 책상을 두드렸다.

"당신, 또 나 몰래 어디다 일억 삼천 짜리 땅을 샀구나? 그래서 기준을 넘는 거지?"

"일억은 원, 텐, 헌드레드, 사우전트, 텐 사우전트, 원 헌드레드 사우전트..."

B는 아내에게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다 핀 다음 하나씩 접어서 일억을 영어로 세고 있는 승현을 노려보았다.

"박승현! 할아버지가 말하는데 어디서 자꾸 버릇없이 끼어들어!" 큰 소리로 B는 승현에게 외쳤다.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대화를 멈추고 가족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볼 정도였다.

"아빠!" 

"당신 왜 그래?"

"왓츠 롱 윗 유?"

"저거 또 영어로 말하는 거 봐라. 할아버지 앞에서는 한국말 써야지!"

"진짜 짜증 나" 승현은 자리에 주저앉아 바닥을 보고 작게 말했다. 하지만 테이블 안에 있는 모두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크기였다.

"너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승현이, 할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빠도, 아니 손자가 영어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데, 응원은 안 해주시고, 왜 먼저 화를 내시고 그러세요!" 

"당신, 엄한 승현이 잡아서 빠져나올 생각 하지 말고, 얼른 말해봐요. 일억 삼천으로, 이번엔 누구 말을 듣고 어디다 어떤 땅을 산 거냐구요. 아니 내가 언니랑 괜히 친해진 줄 알아? 당신이 투자했다가 돈은 하나도 못 벌고 헛발질만 해 대니까, 나라도 공부 제대로 해야겠다 하고, 티파티며 등산이며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친해진 거라구요. 이제는 나도 부동산이니 세금이니 좀 아니까, 어물쩡 어물쩡 넘어갈 생각 말고"

"엄마, 아빠가 좋은 투자 건 있다고 땅 샀다가 손해만 본 게 그럼 우리 어렸을 때, 88 올림픽 할 때 어디 깡촌에 선수 전용 호텔 만든다는 루머 믿고 샀었을 때 말고도 더 있었던 거예요? 이번 디즈니 랜드도 그럼 신빙성이 없는 거네?"

가만히 앉아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만 하고 있던 D도 말을 보탰다. 




B는 지끈지끈 아파오는 머리를 양 손으로 감싸 안았다.  B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멋있게, 자신이 새로 받은 땅의 가능성과 가치를 설명하고, 차갑고 비장한 태도로, 너희들이 좋아서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다, 이렇게 선을 긋고, 그러니 내가 이 땅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게 너희들이 알아서 잘해 보아라. 하고  공정하지만 아버지의 권위가 서 있는 태도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아내는 언제 세금 공부까지 한 것일까. 새로운 고속철도역이 들어선다는 말을 듣고 땅을 샀건만, 새로운 고속선을 놓는 사업은  사업성 평가도 통과하지 못하고 좌초되었다. 팔려고 내놓은 지 세 달이 넘었지만 문의 한 통 없었다.  


문득 B의 눈에, 이쪽 눈치를 살피며 카트를 끌고 다가오는 종업원이 들어왔다. 아마도 빈 접시를 치우러 오는 모양이었다. 이름이 베티였지.. 차라리 확 저 아가씨에게 땅을 줘 버려?  저 아저씨에게 준다면 진정한 감사 인사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될 일이었다. 아무리 미워도 내 재산은 내 핏줄에게 넘겨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B는 지금 기분으로는 도저히 땅을 C나 D에게 줄 수가 없었다. 역시, 이 땅은 저런 싸가지 없는, 그렇지만 자기 밥벌이는 어쨌든 하고 사는 이 두 놈이 아니라, 막내에게 줘야겠다. B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그러고 나서 B는,  오늘은 막내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내가 뒤늦게나마 이 자리로 와서, 며칠 못 씻어서 꾀죄죄한 몰골로, 자신의 영화와 시나리오에 대한 열정을 피력하고, 자신은 사회적 성공이나 부나, 아무튼 아버지가 못 가지셔서 더 아들 딸들이 갖길 원하는 그런 것들을 대신 쫒을 생각이 없다고, 매번 하던 대로 자신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을 또 하게 된다면, 자신은 정말 이 땅을 베티에게 줘버릴지도 모른다.  제발, 이 자리에 얼굴을 비추지 말아라, 너를 위해서.  B가 결심을 굳게 먹고 땅을 막내에게 줄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그 보다 조금 빨리 승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을 흔들면서.

"엉클! 히어! 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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